본문 바로가기
역마살 여자의 방랑기/걸어서 세계 속으로 1

2016. 3. 25~2016. 3.31.경주나들이 셋째날 - 박물관, 포석정, 지미왕릉

by Esther♡ 2019. 5. 7.
728x90
반응형

§2016. 4. 28.에 작성§

 

셋째날은 발목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마냥 놀 수는 없어서 그래도 슬렁슬렁이래도 갈 곳들을 정해 나갔습니다. 어차피 진해까지 갈 계획을 짤 때 혹시나 해서 사진정리도 할 겸 노트북이랑 영화랑 드라마도 저장시켜놓은 외장하드도 같이 들고 갔으니 너무 발목으로 너무 힘들면 돌아와서 냉찜질하고 쉬면서 사진도 정리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되니까요.

오늘은 월요일날 쉬는 박물관에 먼저 향합니다. 참 징하게도 많이 가네요.^^

 

 

 

항상 들어가면 성덕 대왕 신종이 걸려 있죠 어릴적엔 밑에 받치는 것이 없이 그냥 걸려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언제부턴가 저렇게 밑에 받쳐놨더라구요.ㅜㅜ

 

 

안압지라기도 하고 부르고 더 익숙한 동궁과 월지의 못에서 건져낸 현존하는 배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배죠.^^ 학교에서 공부할 때, 책과 선생님의 말로만 보고 듣던 것을 압축해서 모형까지 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이라서 저희 부모님도 제일 가까운 곳이 경주 박물관이었던 터라 박물관과 불국사, 석굴암 등에 자주 데려다 주셔서 고향인 울산보다 더 익숙해서 다른 곳도 으례 이러겠구나 싶을 정도로 자주 갔어도 질리지가 않네요.^^

 

일종의 저장소, 창고 같은 역할을 했던 독에요. 곡식같은 것을 저장하는 데 이용되었다는데 사진이 흔들려서 첨부하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빗금모양으로 무늬가 세겨져있어요.^^

 

처마 귀에 저런 것을 올려놓아 악귀를 쫓는 부적같은 역할을 했다고 배운게 두고두고 가네요.^-^

 

 

동궁과 월지의 모형이에요.

보통이 아니죠? 나중에 가볼 곳이기도 하지만 도로가 중간에 관통해서 아쉽고 근처에 철도가 지나가서 제 몸에 그렇게 쪼개지고 철도가 지나가는 것 같아 아리지만, 그래도 넓고 큰 궁전에 쉼도 있고 사신이 오면 손님 접대도 하고 동궁을 두어 세자가 교육을 받고 거주하였던 곳​이기에 지금 확인되고 복구해놓은 것보다 더 아름답고 웅장하고 방대한 곳이었을 거라 추측해요.

 

 

 

 

 

 

 

 

 

주렴구네요. 술마시면서 술게임으로 놀기 위한 장난감이자 주사위인데 보면 벌칙같이 되어있어서 걸리면 곤혹스럽기도 할 것도 있더라구요.

지금 접할 수 있는 주렴구들은 다 복제품이고 안압지에서 발견된 것은 당시 탁본이랑 사진촬영등을 다하고선 얼른 말리고자 하는 욕심에 발굴 담당자가 오븐에 넣었다가 홀라당...!!ㅜㅜ 재와 함께 나왔다...하더라구요. 그나마 탁본을 다뜨고 사진으로 남겨놔서 다행이지...! 순간 주렴구 태워먹은 그 분 얼른 말리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조급한 마음에 태워먹은 것은 옴팡 쥐어패고 싶네요.--^

 

 

 

제가 사회, 문화적인 것에 관심이 많고 식문화와 의복, 장식구 같은 것에 관심이 있다보니 고분군이나 다른 건물터같은 데서 땅 파고 있었다면 고분 모양이나 만들어진 방식에 눈이 가고 인지를 하겠지만 그보다 거기서 나올 유물에 더 관심이 많아서 제일 먼저 보고 싶은 마음에 두 손 걷고 달려갔을 거에요.

오빠네 딸래미들인 조카들 2명도 누가 여자애 아니랄까 봐 박물관 같은데 가면 장식구, 금 같은 것들 전시한 곳 앞에 붙어서 떠날 줄 모른다고하더라구요.^^

 

 

 

 

 

 

 

 

 

 

 

 

 

 

오수전인가 그러네요. 가물가물...!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벌써 한달이 다되어 가네요...!^^;;;

 

 

 

 

 

 

 

 

철을 다룰 줄 아는 자가 힘을 얻나니...!^^​

철을 다루기위해 쓰던 풍로와 거푸집, 모루 등이에요.

혹시 <주몽>이란 대하 사극을 보셨다면 아셨을 거에요. 왜 철에, 그것도 강철로 만든 검에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는지^^...!

당시엔​ 철을 가공할 줄 아느냐,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결정되니 나라의 힘을 강력하게 하려면 무기를 만드는 철의 중요성을 주몽도 잘 알았을거에요.^^

 

 

 

 

호우명이네요.^^

역시 교과서나 백과사전같은 책에서 보아오던...!^^; 공시준비하면서 몸서리치게 봐오고 달달거려서 잊어버리고 싶어서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렸어요. 저 제이름 석자와 기초적인 한자만 쓸줄알아요. 그룻에 있는 글이 뭐냐고 물어보신다면...!ㅜㅜ

 

부장품 중에 일부네요.^^

 

 

 

 

무덤 발굴했을 당시 있었던 것을 보고 부장품이 있던 위치를 보고 매장당시 추측해서 재현해놓은 모습인것 같아요.^^

천마총에 가면 무덤 속에 발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것을 볼 수 있으니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낚시 줄이 보이는 건 앞서 울산에서 발생한 5.0 지진으로 인해 혹시나 예방하는 차원에서 관장님과 연구실장님이 외부 충격에 취약한 전시물들이 상당수 전시되어 있어서 유물에 따라 이런 유리잔같은 유물은 낚시줄로 묶고, 금령총 기마인물상과 토우항아리 같은 신라 토기 안에는 비중이 무거운 금강사 모래를 담은 비닐용기를 넣고 실리콘으로 토기하부를 바닥에 붙이며 덩치가 큰 삼화령 아기삼존불과 남산 신성비 등의 석조물은 목재로 받치는 작업을 벌인 끝에 상하지 않고 보존이 되었으니까요.^^

 

 

 

금석문이라고 돌에 글을 새겨 비로 세우는 걸 말하는데요, 지금 남아있는 것이 신라시대의 것이 대부분인 걸로 기억을 하네요.^^;;

 

 

.

이차돈의 순교비도 보이네요.^^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가 공인되게 된 내용과 그림을 새겨서 전하도록 만들어놨네요.^^

 

 

 

 

지금부터 부장품들이네요.

내물마립간부터 부장품이 간소해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순장도 지증왕 때가 되어서야 금지되었다는데 간소해졌다고 해도 그 양과 질은 오죽할까요...!^^;;

 

 

 

 

 

 

 

 

 

 

 

 

 

지석이네요.                                                                              

예전에 학교에서 배울 때 무령왕릉에 나온 지석이 일명 매지권으로 지신에게 묘지로 쓸 땅을 산다는 의미로 일종의 문서로 돌에 해당하는 사람의 신상과 행적, 땅의 위치와 넓이 등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배웠던 터라 가물가물거려서 폭풍검색으로 알아본 거론 무령왕릉에 나온 것과 함께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板石)이나 도판(陶板)이라고 하네요. 그래도 오래되서 그런지 희미하게 남았을 뿐 거의 다 지워진 모양이에요.

 

 

 

장기판이랑 장기돌이네요.^^ 남아있는 것이 신기한...!^^

 

 

 

 

 

 

 

 

 

신라 장적(新羅帳籍), 또는 민정문서라고 불리는 문서예요.

그렇게 경주박물관을 뻔질나게 다니면서 이걸 본 기억이 없었던 걸 보면 학교다닐 땐 흘러들었던 모양이에요. 공무원 시험 공부할 때 다소 생소해서 이해가 안되면 외우기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에 미친듯이 달달 외우다시피했던 걸 보면...!^^;;;

1933년에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네요(뭐... 뻔하죠. 왜란이나 일제시대 때 강탈당한 거죠...!^^;). 가로 58cm, 세로 30cm의 닥종이에 해서채의 글로 정리되어 있는 서원경(西原京 : 청주)지방 4개 촌의 장적(帳籍)으로 당시 촌락의 이름과 면적, 부역과 군역을 이행할 수 있는 장정이 필요하기에 호구수, 평민,노비 포함한 연령별, 남녀별 인구수와 증감, 논, 밭의 면적, 말과 소의 수, 특산물(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삼베, 비단 등) 등을 기록하여 안정된 징세와 역 부과를 위해 매년 조사해서 3년마다 자세히 기록하는데 그걸 하던 촌주는 왠지 죽어났을 것 같단 생각이...!^^

아직 일본에 뺏긴 상태에서 돌려받지 못 한 상태이고 복제본이 저렇게 전시되고 있어요.

 

 

 

 

 

 

 

 

 

 

미륵삼존불. 온화하고 자애로운 모습에 저도 맘이 편안해졌어요.

이 불상들이 전시된 전시관에 갔을 때쯤엔 약해져서 한번씩 시달리다시피하는 왼쪽 발목의 고질적인 통증은 물론 붓기까지해서 걷는 것이 힘들어서 사진이 많이 없네요...! ㅜㅜ

 

밑에 이어지는 유구는1996년에 지금의 불교 미술관을 건립할 당시 신라시대 당시의 ​수례바퀴 자국이 발견되어서 그걸 그대로 묻어버리고 세우는 것이 아닌 언제든 볼 수 있도록 유리바닥으로 설명과 함께 보존을 했더라구요.

덮어버리고 여기 아무것도 없~~다~! 할 수도 있었는데도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도 덮지 않고 소중한 유구를 볼 수 있게보존하여 볼 수 있게 해줘서 볼 때마다 고마웠네요. 비록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은 유감이지만요.^^(그래도 얼마 전에 임기 얼마 안남은 공주마마께 딸랑거리려다가 황룡사 유구를 상하게 햇던 일은...!!!--^)

 

 

 

 

 

사진으로만 보면 그닥 안높아보이고 안무서울 것 같지만...!!^^;;

실제로 자세히 보기 위해 저 유리바닥 위에 올라서면요...!

상당히 아찔하게 무서워요~! 꼭 바이킹 탄 거처럼요~^^;;;

 ​

 

 

같은 반가사유상인데도 머리 모양이나 발 모양, 옷주름 등이 다르죠? 이것이 제가 불상을 포함한 조각들을 좋아하는 이유에요.

 

 

예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란 책에서 석굴암의 석불 이마에 다이아몬드 같은 투명하고 맑은 보석이나 수정같은 것을 박아서 동해에서 올라오는 햇빛을 받으면 떠있는동안 빛을 받아서 환하게 빛을 내게 했으리라...!는 구절을 봤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보니 이런 불상을 보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유심히 보면서 상상하게 되네요.^^

 

 

 

 

항상 볼 때마다 힘이 넘치는 금강역사에요.^^

금강역사의 근육질의 몸은 워째요~!^^;

 

 

 

 

 

 

 

국사책에서 잘 보이던 기마상이네요.^^

 

 

신라 최대 사찰인 황룡사와 신라 보물인 진흥왕의 천사 옥대와 장륙상과 함께 삼대 보물인 구층 목탑 모형이네요.​ 지금 발굴되어 확인된 것과 사료들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모형이지만 그래도 사찰의 전역이 약 2만 5천평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가 어마하네요.^^ 

전날 황룡사지 갔다가 그 터의 넓이에 기죽어서 구석구석 다 못 돌아다녀 보곤 그냥 설렁 설렁 다녀보고 온 것이 다행이다 싶을 만큼 잘 못 보고 왔단 아쉬움도 있지만 그보다 그러지 않아 다행이란 맘이 더 크네요.^^;;

 

 

 

 

신라대찰인 황룡사가 호국 사찰의 성격이 있는 만큼 작은 나라가 외세의 침약에서 보호받고 떵떵거리며 권세를 누리기 바라는 염원만큼이나  무지막지하게 크고 웅장한 9층 목탑. 부처님 앞에 공적을 쌓는 다는 마음으로 불길한 꿈에도 불구하고 이 목탑을 세우는데 애를 썼던 백제 이바지란 기술자는 완성 후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에게 하던 말을 듣고 주위 이웃 나라가 무릎꿇고 항복하길 바라는 마음에 자신을 불러 9층 목탑을 세웠다는 걸 알고 원망스러운 마음을 안고 돌아갔다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하여간 황룡사와 관련된 설화는 면적만큼이나 많아요.

 

 

 

 

황룡사는 창건설화 외에도 신라 국찰이자 호국사찰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설화가 많고 그만큼 부처의 자비와 위엄, 가르침을 전하고 거기에 황룡사가 이름 값을 더하는 것이죠.^^

삼국유사에도 관련 설화가 있는데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벽화에 까치들이 진짠 줄 알고 아서 머리박고 죽었다는 설화도 있으니 파고 보면 많은 설화와 이야기는 무궁한 것 같아요. 

 

 

 

박물관에서 나와서는 다른 곳에 더 가보고픈 욕심에 서로서로 멀지 않는 곳에 모여 있는 오릉, 삼릉, 포석정으로 향했죠 남산권이라 약간 외지다 싶은 느낌도 있었고 아주 어릴 적 아버지께서 데리고 오셨을 때도 시골이다...! 느낌이 있었으니까요. 가는 길에 기사분께 듣기론 포석정 중심으로 더 들어가면 삼릉, 시내권으로 나가면 오릉이라면서 시내버스든 택시든 차로 가면 가깝고 삼릉은 큰 길로 걸어서 가면 많이 걸리지만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샛길로 가면 한 30여분? 정도 걸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포석정에도 입장료가 있어요. 얼만지 기억이 안나지만요.

 

 

 

 

 

 

 

처음 만들어졌을 땐 수로가 이어져 있어서 물이 상시 흐르겠금 만들어졌다는데 나라의 흥망과 함께 방치되었던 만큼 망가지기도 해서 ...!^^ 기록과 연구들이 모아져서 여기가 어떤 곳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졌겠구나~!하는 것이 알려지는 거죠.^^

 

 

 

새 카메라 렌즈 발을 너무 잘받아준 모란 꽃망울.^^

3월 말에 갔던 탓에 아직 모란꽃이랑 개나리가 많이 펴있고 그나마 좀 이르게 핀 벚꽃만 군데군데 있더라구요.

 

 

 

 

 

 

불편한 발목 때문에 불가분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포석정까지 이동했던 택시 기사분이 알려주신 샛길이에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농촌 길같아요.^^

발목만 허락한다면 가까운 삼릉에는 가보자해서 나선 길.

 

 

 

저 멀리 왠 고분(?)이 있네요?^^;;;

기대하지 않았는데 왠열~!^^

울타리가 있는 걸 보니 아주 옛날 역사 속 인물인 것 같은데 우선 고고~!^^

 

 

 

 

크기를 보니 역대 고분들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다 할 정도로 작고 아담하고 둘레돌도 없이 일반 위인들과 별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나중에 계단 옆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신라 6대 왕 지미왕의 무덤이더군요.(죄송해요...^^;;;)

 

 

그래도 왕릉이 햇볕 잘 들고 따뜻하고 좋은 땅에 있네요. ​지미왕은 이름은 지미 혹은 지마라 하고 왕호는 이사금, 또는 이질금이었으며 선왕인 파사왕의 맏아들이자 신라 왕들 중에 석씨와 함께 몇없는 박씨 왕이더라구요.

(사실 본관이 경주고 흔한 김씨 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김씨 왕들 외에는 잘 기억을 못 해요.^^;; 성씨 시조인 박혁거세나 석탈해 말고는...^^;;; 기껏해야 경애왕 정도??^^;;)

 

하여간 재위 23년동안 풍파가 없는 왕이 어딨겠냐만은 즉위 3년만에 침공한 가야에 패하고 열받아서 다시 쳐들어가도 큰비로 인해 뜻을 못 이뤘을 뿐 즉위 10년에 쳐들어오는 왜구는 신하를 보내 용케 쳐들어오는 것을 막고 화친을 맺어 외교적으로 끝내고 14년에 말갈은 막으려하기엔 역부족이라 백제에 도움을 장수만 5명이나 보내어 돕도록하니 말갈이 물러갔다고 해요.

후사가 없어 3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지미왕의 백부라는 말도 있고 유리왕의 조카라는 말도 있고 지미왕의 아들이란 말도 있는 7대 왕 일성이사금, 일성왕이 이었다고 하네요. 

 

 

더 머물고 싶고 삼릉까지 가보고 싶었으나 사고로 한꺼번에 관절 두군데나 다친 왼쪽 다리가 너무 힘들고 상태가 않좋아서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나와 숙소로 돌아가 게스트 하우스의 공용실에서 티비보면서 일찍 저녁들고 쉬었네요.^^

 

 

 

☆ 개인 여행기입니다.

여러분의 공감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