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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여자의 방랑기/걸어서 세계 속으로 1

2015년 10월 27일 서울에서 셋째날 - 서대문 형무소 박물관, 배재학당, 덕수궁

by Esther♡ 2019.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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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0.에 작성한 여행기

 

이날은 전날 일기 예보도 안보고 우선도 두고 가서 비 맞았던 것이 남아서 조식 먹기 전에 준비하면서 일기예보도 미리 챙겨보고 혹시나 몰라 챙겨갔던 우산도 가방 안에 넣어갔더랬습니다. 덕분에 가방이 더 무겁더군요.^^;;

제일 먼저 들린 곳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입니다.

울산에서 모임(좋아하는 뮤지컬 배우 생일 파티라 적고 모임이라고 읽습니다.^^;;)까지 포함하여 4박 5일 있을 짐꾸리면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도 가볼 거에요."라고 했을 때 그런데는 왜 가보려고 하느냐며 어머니께서 찝찝하고 맘 상하신 듯한 표정이시더군요.

아들 딸을 늦게 보셔서 그렇지 해방 직전 몇년 전에 태어나셔서 해방된 것만 겨우 듣거나 기억하실 분들이지만 청년시절 비슷한 연배의 청년들이 민주화운동하다 잡혀서 들어갔던 곳이라는 인식이 있으셔서 그러신 거겠죠...!^^

어김없이 지하철로 돌고 돌아서 나와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이 독립문이었어요. 나중에 해설사께서 해설하시면서 독립문을 잠깐 언급하셨지만 독립문은 조선이 일본에  잠식당하고 식민지되기 전 당시 해외에서 견문을 넓히고 온 조선의 지식인들이 청에서 독립한다는 의미로 사대의 의미가 있는 영운문이 있던 자리에 저 독립문을 세웠는데, 식민지 통치 이후 독립문 근처에 서대문 형무소를 만든 걸 보면 일본도... 참...! 그렇습니다...!!-_-

 

 

 

 

전날 온 비로 길도 젖어있는 감도 있고 흐리기도 해서 마음이 무거운데 입구에 가까이 오면 올수록 맘​이 많이 무겁고 상당히 아파오네요...!

 

 

수감된 죄수(뭐 당시 죄없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어떻게든 집어 삼기려던 일본인들과 앞잡이들 눈엔 조금이라도 밉보이면 끌려오는 곳이 여기를 포함하여 전국 형무소 및 감옥이었으니...!)들을 감시하고 탈옥을 방지하고자 세워진 망루가 몇군데 세워져 있지만 보기도 참 불편해져서 저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가더라구요...!

담을 지나 요금을 내고선 바로 앞에 있는 건물 입구로 들어가란 안내를 받자마자 바로 직선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 보안과 청사더군요.^^

근데 전 무슨 운이 없는지 전날엔 경복궁갔을 때 미친듯이 큰소리로 떠들고 비매너로 다분했던 중화권 외국인들 땜에 스트레스 폭발하더니 이날은 때마침 다른 학교같은데 견학온 듯한 초등학생 조무래기들이 와서 어찌나 뛰어다니고 시끄럽게 떠들던지 저절로 샤우팅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네요....

아이들이니까...!하고 무조건 이해해달라고만 하지 말구 집에서부터 잘 가르치면 밖에서도 지도하는 어른들이 한결 편하실거에요 소리 지르실 일도 적을 거구...!^^;;

어린이집에 있어봐서 저도 얼추 알죠. 물론 아이들이 어느 시기에 있던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지역아동센터나 주일학교에서 봉사활동하거나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면서 저도 언성이 높아지긴해도 영유아기 아이들은 잘만 가르치고 모양을 잡아주면 커서도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집에서 도와주지 않아서 10배 이상 힘들었네요.

당시 지도하신 선생님들 얼굴에 극도의 스트레스가 쌓인 것을 볼 수 있을 정도고 일부 아이들도 조용히 하도록 지도하시는 선생님의 존재를 가뿐히 무시하는 것이 보여요. 집에서 어떻게 키우셨을지 아이들을 통해 보이니까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그 시끄러운 가운데 한시간여 정도 해설사 분의 설명을 듣고 다시 차근차근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1시간동안 대충대충 해주시는 편인데 그날 예약없이 당일 가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지 문의했을 때 운이 좋아서 방금 시작해서 만났던 선생님은 1시간 넘게 차근차근 잘 설명해주셨다. 제대로 알아야할 것들도 잘 설명해주시고... 운이 좋았다...!^^

 

 

1908년 10월 경성감옥으로 개소해서 따로 경성감옥이 만들어지고 서대문 감옥으로 또한 서대문 형무소로 ​바뀌면서 엄청 확장이 된 모습이 모형으로 만들어졌고 지금 남은 부분은 이 모형에 일부분이니까...!^^

 

​1987년 의왕시로 옮겨가서 88 올림픽 앞두고 왕창 없애버리려는 걸 "아픈 역사도 역사인 것이다. 그 역사조차도 보존하여 후대에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야한다."는 소리가 많아서 일부 분이지만 일본군? 일본 경찰?? 하여간 일본 사람들이 본국으로 들어가면서 왕창 폐기하고 간 자료들을 발굴하고 복원, 보수작업을 거쳤고 지금도 자료들을 끊임없이 복원하고 있다고 해요.

 

당시 일본이 식민지로 더는 부릴 수 없게 되어 퇴각하면서 ​모든 자료들을 폐기하려는 시도하고 돌아가다보니 지금도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감되었고 누가 있었는지 등등 정확히 알려진 것도 없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안창호 같은 분들 정도만 알려진 정도라니...!!-_-^

 

 

이렇게 당시 연대별 모습을 볼 수 있게끔 만들어 놓기도 했어요.^^

 

 

 

 

 

해방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이 물러나면서 모든 자료들 폐기하도록 했는데 용케 설계도가 어디에서였는지 들었는데도 한달이 다 되어서 기억이 안나지만 그래도 용케 발견이 되어서 이렇게 ​구조와 배치는 물론이고 어떤 모습으로 지어졌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요.

 

 

 

용수라고 하는데 이걸 씌운 이유는 자신이 가는 길을 못 보게 하여서 경찰서나 형무소를 탈출해도 길을 몰라 얼마 못 가고 잡힐 수 있게 하는 이유도 있고 같이 잡혀가는 사람들을 못 보게 하여서  혹시나 뒷일을 도모하지 못 하게 할 요량도 있다고 하더군요.

형무소 내에서 이걸 쓰고 이동할 경우가 있는데 사형장과 면회객을 만나는 갈림길에서 면회객을 만나러 쭉~ 가면 사는 거라 안도하고 사형장으로 꺾어 가면 죽는 것이기에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사형장 입구에 있는 미루나무를 잡고 그렇게 울었다고 하네요.

 

 

 

 

의병이었던 사람들이 일본에 요주의 인물로 주목 받다보니 언제든 잡으려 들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호신용으로 저렇게 의심사지 않게 만들어 들고 다녔다고 해요.

대부분 칼이던 것도 당시 귀하고 총을 쉽게 구해서 소지하기 쉽지 않던 시대였기에 주로 칼을 저렇게 숨겨 다녔다고 하네요.

 

 

 

죄수 허리에 채우던 요라는 건데 쉽게 도망가지 못 하게 하려고 채웠다고 하더군요.

듣자마자 허탈해서 저도 모르게 저걸 하고 있다간 얼마 안가서 디스크 오겠다...!란 말이 나오더라구요. 얼마나 불안하면 저럴까, 저럴꺼면 왜 식민지로 만들었을까...? 하는 답답함이 오더군요.

 

 

 

 

일부 문서 이름이 한자이긴하지만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번역하다보니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 뜻하는지 쉽게 매치가 잘 안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군요.

당시엔 사진이 흔하지 않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것도 아니고 교통, 통신이 지금만큼 발달이 안되있던 시대여서 자신들에게 위해가 되는 이들을 잡기 위해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참 철저하게도 모아서 기록해두었네요. 참 자기들 맘에 안들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일 정도로 꼼꼼히도 표시하고 조사했네요...!ㅜㅡ

 

 

 

권오설 열사는 당시 한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신학문을 어느 정도 배우기도 했고, 계몽적 사회운동도 하였지만 독립운동도 함께 하였으며 워낙 신출귀몰해서 조선의 영혼까지도 말살시키려는 일본 압제자들의 눈엔 그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을 터...!

 

권오설 열사가 6.10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에 잡혀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인해 희생되어 출감을 100일 정도 앞두고 옥사하였으며 유족들에게 인계되기 전에 권오설 열사가  얼마나 미웠으면 그의 혼마저 말살시키겠단 의지로 철관에 넣어서 열어보지 못 하도록 철저히 확실하게 봉해서 주었다고 하는데 사진에 있는 것이 바로 권오설 열사의 철관이라고 해요.

그가 사회주의자여서 사상적으로 색안경끼고 볼 수 있으나 나라 잃은 어두운 시대에 망국의 한은 매국이나 친일한 자들이 아니라면 누구나 똑같지 않나...!!

 

그 사상을 떠나 매국, 친일 인사들과 일본 압제자들을 처단하고 식민지배에서 조국을 위하고 민족을 해방하고 독립을 이루려는 마음만 봤으면 좋겠다 싶어요. 해설하시던 분도 사상적인 부분 때문에 권오설 열사나 의열단의 김원봉 선생을 이야기할 때 조심스러워하고 시비거릴 남기지 않으시려고 최대한 조심해서 살짝 말하고 넘어가시​고자 하는 것이 보였어요.

그리고 암울하던 당시 의친왕은 왕족으로 일제에 극심한 감시를 받는 입장에서도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아까지 않으셨고 의친왕란 직호에 친 자를 일본에 아부라고 해야하나 친해지란 의미가 있다고 하여 빼고 의왕이라고 부르길 원했단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이라면 징글징글했고, 이재명 의사도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총과 칼을 준비해서 때가 되었을 때 달려들었으나 죽이지 못 하고 상해만 입혔을 뿐 생명이 오락가락하던 이완용은 욋과 수술을 받고 죽을 때까지 평생 폐렴증세로 고생하다가 살만큼 살고 죽었지만(조금만 의학발달이 늦었으면...!!) 이재명의사는 그 덕분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이 되어 재판 받았으나 사형이 언도되어 항소도, 항고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겨우 스무살의 창창한 나이에 죽었다고 하네요...!

 

나중에 찾아보니 미국 노동이민했던 집안에 사람으로 강제 합병이 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귀국 후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백방으로 협력하고 노력하였으며 훗날 억울하게 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는 말을 남기고 순국하셨다고 해요. 안타까운 젊은 생명이 나라를 위해 나섰다가 저렇게 일제의 손에 의해 가버리기도 했네요...!ㅜㅜ

 

 

 

해설하시는 분의 말처럼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 한반도를 집어 삼키고 괴롭힌 것은 아니죠.

 

양화진에서 보았던 소다 가이치 부부나 일본 군국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의 문화 유산을 사랑하고 제암리 교회 방화사건으로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라 불릴 일본의 몇 안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처럼 세계지도에서 지워진 조선에서 그 암울한 시대에 조선 사람을 위해 일하고 지키려했던 이들도 있었는데 미야케 시카노스케란 분도 그런 분이죠.

 

1927년 4월 경성대의 교수로 와 있으면서 지내던 중 용케 독립 운동을 하다 서대문 경찰서에 잡혔던 이재유가 탈출하자 자신의 집 다다미 방 밑 토굴에 감춰두었다고 하네요.

어찌 알고 온 일경에 잡혀서 현상금이 걸린 이재유를 어딨는지 불으라고 고문당하다가 이재유가 도망갈 시간을 주고자 24시간,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해서 충분히 도망갈 수 있게 했고 일경이 모두 물러난 후 이재유는 조용히 짐 싸들고 나갔고 약속한 시간에 와서 고아대는 일경에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는 자신의 집에 있다고 말했다고 해요.

화들짝한 일경이 바로 관사를 덥쳤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고 있는대로 분했던 일경은 있는대로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를 두들겨 팼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론 유일무이하게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일본인이라고 해요.

 

나중에 이 분에 대해 찾아보니 적당히 눈감으면 승승장구하며 편하게 살 만큼 전도유망하고 실력있고 사회적 위치가 좋았음 좋았지 나쁜 분이 아니었는데 조선의 젊은 청년들을 가르치고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며 투쟁하였으며 자신의 제자인 이재유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고 도와 줬던 일로 인해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아내되는 분도 헌책방을 차려서 옥바라지하게 되고 출옥 후에도 미운털이 박혀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교단에 서보지도 못 하고 1945년 8월 15일 패망 이후 일본의 대학 강단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인들의 고혈을 어떻게든 빨아먹으려는 압제자가 있는 반면 이렇게 당시 조선을 어떤 형식, 어떤 방법으로든 지키고 도와주며 사랑하던 일본이도 있었다는 거...!

지금도 일본 내에 수구 꼴통 우경화되어 한국이라면 아직도 식민지 지배의식으로 욕하고 혐오스러워하는 무리도 있지만,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매국노 대접을 넘어 돌 맞아 죽을 지경이 될 정도지만 "독도를 한국에 돌려줘야한다."고 돌직구 날리고 사회운동을 마이 웨이로 해대는 배우 야마모토 타로나 지금도 여전한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잠시 활동 했던 SMAP의 쿠사나기 츠요시같이 바른 소리, 옳은 소리하기도 하고 무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하며 고마운 이들도 있는 만큼 일본이라고 해서 무조건 증오하고 원망하며 미워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너무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지라 너무 먹먹해서 중간중간 미처 사진으로 남긴 부분이 없어서 해당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는데, 여기에 수감되었던 이들 중에 그나마 발굴되었거나 남아 있던 수형기록표들을 모아둔 추모공간이 있어요.

 

ㄱ, ㄴ, ㄷ, ㄹ,... 순으로 정리되어 있고 중간중간 빈칸이 있는데 아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발굴, 확인 중이라 그때 그때 넣을 수 있도록 한거라고 들은 기억이 있어요. 

얼마나 형무소에서의 생활이 거칠고 힘들었으면 맨 처음에 있는 수형표에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을 보면 몇년 단위로 생활한 수형기록표가 기록될 때마다 훅훅~! 한번에 몇십년씩 늙어버린 것을 볼 수 있는데 미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력이 있고 예의 주시하는 사람이라서 일제도 어떻게 하지 못 하고 형무소에 잡아다 넣고 당장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롭히는 정돈데 옥살이하다 자신들도 세계적인 문명국가의 사람인 만큼 인권을 중시한다는 눈가리고 아웅하듯이 도산 안창호 선생이 다 죽어가니까 죽기 직전에 병보석으로 보냈는데 안창호 선생은 얼마 사시지 못 하고 돌아가셨다고 하니 아오~! 진짜 일제가 이런 데는 비상하게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밖에 말을 할 수 가 없네요...!!ㅜㅜ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수형표에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종교인이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 님은 항상 책에서 보면 인자하던 스님의 얼굴로 계셨는데 저 독기 어린 얼굴은 무지 낯설네요...!^^;;; 

 

​둘러보다가 유관순열사가 어디있는지 찾아보라기에 바로 제일 상단에 있는 열사의 수형기록표를 보고  최근 오래되지 않은 신문기사에서 교과서나 다른 기록물에 자주 수록된 사진이 이미 형무소에 들어가 고문으로 얼굴이 부운 상태였고 그로 인해 비대칭에 멍이 들고 눈에 충혈 등 구타에 의해 상한 흔적들이 있어서 남겨진 사진들을 참조하여 3D복원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있어 "저기에 있는 사진은 이미 고문으로 고생해서 많이 부어 있는 얼굴이라고 하던데...!"하니 해설사분께서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하면서 나중에 여옥사로 갈텐데 거기서 설명해주겠다고 하셨네요.

 

이 추모공간에 들어왔을 때 들리던 "많이... 추으셨죠? 많이... 그리워셨죠...? .... 이제 편히 쉬세요...!"하는 말이 왜 이렇게 강하게 쿡~!!! 박히던지...! 울음이 쏟아지려던 것을 간신히 참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해설사 분의 설명을 듣는 내내 여기에 수감되어 얼마나 끔직한 순간 순간을 견디셨어야 했나하는 생각에 잘못 먹고 체한 것 마냥 명치있는 곳에 우리하니 아프고 무겁고 몸 둘 봐를 몰라 힘들었어요. 


드뎌 지하로 내려왔네요. 감방에 들어가 보기 전 제일 치를 떨었던, 그래서 사형장에선 더이상 치를 떨 것조차 없게 만들었던​ 지하 고문실로...!!ㅜㅜ 각 공간에 모형을 만들어 상황을 만들어 놨어요.

그 곳에서 너무 치를 떨고 사진남기는 것조차 죄없이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분들께 죄스럽고 죄송스러워서 침울하고 정신이 없어서 사진을 빠트린 곳이 있는데 들어가자마자 있는 심문대기실과 멀지 않은데 취조실을 고문실에서 멀지 않게 해둔 건 일종에 직접적인 구타나 고문이 없어도 정신적인 고통을 미리 줘서 두려움에 심약하게 만들어 원하는 것을 나름 수월하게 얻어내고자하는 심리전인 것이죠...!

참...! 악랄하네요. 너무...!

 

 

물고문에...! ◎.◎;;

 

 

 

손톱 밑 찌르기 고문에...!@.@;;

 

 

고문상자에...!!@-@​;;

 

 

 

벽관고문까지...!!!!

 

있으면 있을수록 몸서리쳐지는지...! 정말 미치겠네...!!-_-;;

초등학교 6학년 쯤에 독립기념관에 갔다가 이 벽관 고문을 마네킹을 넣어서 재현해놓은 걸 보고 기겁했던 기억이 있어서 강산이 변할 정도로 시간이 지났는데도 몸이 굳고 목소리까지 떨릴 정도였는데 당하는 사람은 어찌나 큰 고통일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때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 걸 보니 중학생일 때인 것 같은데 수업 중에 무얼하다 나온 말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선생님께서 저 벽관 고문이 성인 한명 겨우 들어갈 면적에 집어 넣어서 꼼작 못 하게 하는 고문으로 그렇게 있으면 몸이 굳어서 본인 스스로가 못 나온다고 하실 정도로 끔직한 고문이에요.

 

근데 그날 견학왔던 아이들은 뛰어다니면서 저게 하나의 놀이기구처럼 웃으면서 서로 하겠다고 싸우고 장난치듯 하는데...!!!

 

다소 불쾌하기도 했네요. 너무 지나치게 숙연하고 무겁고 심각한 모습인 것은 사실 오버맞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숙연함과 차분함, 최소한 여기서 고초를 겪으셨을 분들에 대한 예의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쾌하지는 않았을텐데요...!ㅡ_ㅡ

서울 오기 전에 미리 갈 곳들을 알아본다고 검색할 때 서대문 형무소 박물관에 다녀왔던 여러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의 블로그에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것이 상당히 불쾌했다면서 아이들이 안왔으면 한다고 온다면 단단히 주의를 주었으면 한다고 상당히 불쾌하고 싫었던 소감을 말했는데 설마...했는데...!!-_-;

결국 아이들 피해서 찍는다는 것이 다 흔들리고 애들이 않나올 수 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웃었던 안웃었던 상관없이 얼굴나온 아이들은 모두 가렸습니다...!

이래서 역사도 역사지만은 예의도 제대로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드네요...! 제대로 역사공부가 되는 것도 중요한데 예의, 예절 공부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저렇게 자신들이 방문한 곳의 역사적 의미는 몰라도 최소한 공공장소에서 뛰어다니고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텐데...! 그것조차 안되어 있으니 외국인들이 와서 봤으면 얼굴 찌푸릴 일이라서 부끄러웠어요.

아이들이 그렇게 휩쓰고 지나간 ​곳을 조용히 지나면서 다음으로 지나가는데...!

고문 도구들과 함께 고문의 흔적으로 눈을 잃기도 하고, 손가락이 부러진 상태로 굳어서 펼수도 없게 되기도 하셨는데 댓가를 바라고 오직 애국심 하나라 한 것이지만 나라에선 알아주지 않고 제대로 된 독립운동가 분들의 처우가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해 제가 다 속상하네요.

 

 

 

 

취조와 고문을 하다가 하다가 끝에는 옥사로 이동하기 전에 이렇게 가둬두기도 하는데 화장실이 따로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서 저렇게 나무 양동이를 두어 용변을 해결하도록 했다네요.

여기 뿐만 아니라 다른 옥사에서도 다 똑같았다니 위생에 얼마나 취약했을지 짐작이 되네요...!

 

 

 

당시 보안과 사무실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교화하는 목적으로 죄수를 불러 교화했다는데 말이 교화지 고문으로 어지간한 윽박지름은 됐고 어르고 달래고 해서 친일파를 만들기 위함이죠.

 

 

 

틀밥(일망 가다밥)은 밥 양을 개인의 형량과 노역의 강도에 따라 차등하여 배급했다고 하는데 항상 정량 이하여서 늘 배고픔과 싸워야했다고 해요.

무슨 북한의 강제(정치범)수용소도 아니고...! 먹는 것 가지고 이렇게 장난치며 괴롭힐 줄이야...!^^;;

밥은 대두 50%, 좁쌀 30%, 현미20% 비율로 3끼를 배급했다는데 당시엔 전쟁으로 인해 쌀이 부족하니까 이렇게 혼합해서 줬데요. 해설사님 말로는 오죽하면 일본에 있는 감옥에서도 수형자들은 그나마 콩의 비율이 적었지만, 대신 간수들이 콩의 비율이 높은 밥을 먹을 정도였다니까요.


 

 

 

11, 12 옥사로 갔을 때 해주셨던 해설사님의 설명이 너무 늦는 여행기여서 그런지 몰라도 가물가물한데 옥사를 지을 때 무슨 형식으로 지어서 한 곳에서 여러 곳을 감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어졌다고 해요.(제가 기억하지 못 했던 그 용어가 파놉티콘 구조였네요.^^;;;)

 

 

죄수들이 편지를 쓸 수 있는 곳인데 개인편지마저 공개된 곳에서 써야할 정도인 건가...? 싶어 띵~ 했어요.

 

 

 

 

간수 감시대에서 보면 좌우, 앞이 한눈에 보여요. 진짜 감시하기 수월하게 만들었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일제 입장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죄수들을 수용하고자 증축한 2층은 사적지 보호 차원에서 올라가지 못 하게끔 계단 입구를 막아놨더군요.

 ​

옥사 복도를 걸어가는데 2층에 누가 있는 것 같아 올라보니... !

 

 

 

이렇게 딱 죄수들을 감시하는 간수들이 있더군요. 손에 돌멩이가 있었다면 확~!던졌을 것 같은 못된 표정으로 악쓰는게 씁쓸하네요.

 

 

시인 이육사의 사촌여동생​이신 이병희 지사님의 저 말 한마디가 찡한 무언가를 남기네요.

고문이 무서웠다면 독립은 없었다는 그 말 한마디가...!

그래요, 그 고문으로 인해서 동지로 같이 독립운동하다 변절하는 이들도 많았어요. 그럼에도.. 그 고문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불사하고 ​독립을 위해 애쓰셨던 분들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람하다 보면 독립운동하셨던 당사자 분이나 가족의 증언이 담긴 VTR 영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잠시나마 서서 보고 있으면 가슴 가운데가 왜 그리도 아리고 아픈지...! 억지로 ㅜㅜ울음을 참는다고 꺽꺽거렸어요...!

 

 

독방인 먹방입니다. 한줄기 빛조차 들지 않도록 해놔서 먹같이 깜깜하다고 먹방이라네요.

한사람 겨우 누울 수 있는 한평도 안되는 공간(약 0.7평)에 배변도 마루바닥 끝을 구멍내어 밖으로 처리하게 하는 등 철저하게 격리를 시킨 공간이었기에 감금되면 정신착란같은 정신병을 얻을 정도였다니 오죽할까...!!​ㅜㅜ

 

 

밖에서 안의 전 구간을 쉽게 확인하고 감시할 수 있는 창인데 안쪽을 비스듬하게 해놔서 사각지역인 바로 밑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눈에 감시가 되겠금 만들어놨더군요. 증~말~~ 기발하다...! \ㅅ/#

 

이 뿐만 아니라 외부 간수에게 요청하거나 알릴 것이 있다면 패통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 간수를 불렀다는데요 감방 안에는 네모난 초인종 모양이지만 밖에는 긴 막대기가 내려오게끔 해서 간수 감독대에서 봐도 쉽게 알 수 있겠금 되어 있어요.

 

감방이 한컷에 담기 힘든 구조에 너무나도 작아보이는 정사각형의 방이라 어떻게 담지를 못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무슨 말을 들은 것도, 무얼 보고 숙지한 것도 아닌데 눈물 가득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기 어린 분노의 한마디가 나왔네요...!^^;;;

 

"이런 곳에서 못 해도 최소 30~40명 정도는 그냥 수용했다는 거잖아...!!-ㅅ-#"

 

듣고 배워도 못 해도 몇년에서 중, 고등학생 시절인데 가기 전에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외에는 딱히 들은 것도 없이 사전 정보도 없이 5평도 안될  정사각형의 감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그 일갈이 나오는데 진짜 속이 미어져서 화가 나고 갑갑해서 해설사와 순간 눈이 마주쳐서 분이 너무 나서 덜덜 떨리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속으로 계속 울었네요. 

 

그 정사각형의 감방에서 최고 30~40명이었나 그렇게 들어갔다고 하니...!

그래서 잘 땐 제대로 누어 있을 수 없어서 모로 누었는데도 숨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따닥따닥 붙​어야 했고 그나마 안되면 군에서 불침번 서 듯 못 누은 사람은 돌아가면서 잤다고 하니...! 여기도 양동이 하나로 변소를 대신하고 있었으니 그 고통은 오죽할까...!

 

​웃기는 게 여름에는 전염병이 옮긴다고 창문을 닫고, 겨울에는 환기를 시킨다고 열어두었다는데 안그래도 난방이 안되어 있는 시스템이라 더욱 시멘트의 한기가 올라오겠끔 해놓은 감방에서 위생상태가 않좋은데 먹을 것도 제대로 안주고 죽어라 고문시키고 힘든 일들을 죽도록 시키면서 그렇게 해놓으니 병 들어 죽고 손발이 동상에 걸려서 사람구실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정말 손안되고 코푸는 격...!--^

 

 

 

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타벽통보법을 이용해서 약속된 신호를 벽을 두들겨 옆 방의 죄수들과 소통했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수감되었을 때 누구였는지 기억안나는데 누가 가르켜주다가 이상한 눈치 챈 간수가 오니 가르쳐 주던 사람이 눈치 채고 용변을 보는 통을 뒤집어 엎고 난동을 부려 위기를 넘겼다는 일화가 있죠.

 

 

여기가 독방에서 배변하면 나오는 통로? 구멍?? 이네요.

 

 

 

공작사로 직물과 기와 등을 만들어 냈던 곳이죠. 몸에 그 어느 것도 지닌 것이 없다는 표시로 맨몸으로 어느 위에 뛰어올라야 했다는데 그만큼 일제 입장에선 사상범, 정치범들을 모아 넣은 곳이니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고자 했던 거긴하지만 거시기하네요.

 

 

당시 나병이라 불렀던 한센트병자들을 ​모아둔 병사네요.

한센트가 말초신경이 죽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병이라는데 하도 손톱 밑을 찔러대는 고문을 하다보니 손끝 신경이 죽어 문드러지다 보니 한곳에 모아두었다는 말을 해주시네요. 유일하게 이 곳에서 온돌이 놓여서 난방이 되는 곳이라고 해요.

 

 

 

격벽장이에요. 햇볕을 너무 안보면 뼈가 부러지거나 질병에 걸릴 수 있다하여 하루에 일정시간 햇볕을 볼 수 있게 하였는데 이마저도 죄수끼리 마주치지 않도록 벽돌벽으로 공간을 만들어서 교류차단과 감시효율을 높인 곳이네요...!

 

격벽장과 한센병사를 지나다보면 보이는 곳이 사형장이 보이는데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용수를 쓰고 감방에서 나가면 어디가는지 보이지는 않아도 감각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죽음을 직감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고 그랬다네요.

 

 

 

 

사형장 건물은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하여 붕괴 위험이 있어서 들어가지는 못 하게 하고 밖에서 보게끔만 했더군요.

 

전시실에도 사구와 사형장 지하를 재현해두었는데 저 목에 걸 밧줄 밑에 지하실이 있는데 사형집행되고 일정 시간 지난 뒤, 의사와 간수가 들어가서 확인하고 죽었다고 하면 시신을 들고 나가서 근처 사구문을 통해 간혹 유족이 시신 반환을 요구하면 전해주기도 하는데 유족들도 사람인지라 일제에 찍혀서 고통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찾으러 오지 않거나 연고가 없는 시신은 바로 내보내서 묻어버렸다는 슬픈 사실이 더이상 한숨조차 나지 않는 무게로 다가오더군요.

 

 

여 옥사로 향했는데 유관순 열사도 여기서 옥사하였다고 하네요.

바로 밑의 사진이 지하 감방인데 한사람이 제대로 누울수도, 허리펴고 일어날수도 없는 공간에 빛도 들어오지 않게 철저하게 괴롭힐 수 있게 만들어 놨네요.

 

 

 

 

유관순열사가 있었다는 감방인데 유관순 열사와 함께 생활했던 분들이 저렇게 함께 설명을 해주네요.

어떤 분은 임신한 몸으로 들어와 해산하기 위해 잠시 나갔다가 다시 애를 안고 들어오기도 했는데 죄인들을 집어넣은 곳인데 아기가 있다고 일제가 먹을 걸 더 주거나 옷이나 기저귀를 더 주거나 하지 않겠죠.

먹을 것이 부족한데도 유관순 열사가 10대 후반의 소녀인 몸으로 자신도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의연하고 어른스런 성품과 자세로 자기 밥을 나눠주기도 하고 아기​를 돌볼 수 있게 배려를 했다는데 그말을 들으면서 더는 시큰거릴 코도 없는 데 또 다시 코 끝이 시큰거렸어요 .

 

 

이 사진이 바로 신문기사로 접했던 3D 복원된 유관순 열사의 얼굴과 고문 전후의 사진들이에요. 지금 보면 확실히차이가 있죠?^^

 

 

이곳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추모하는 추모비에요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있데요.

잠시 묵념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제가 방문하기 얼마 전에 일본 전 총리가 다녀가셨데요, 전 이미 신문기사로 알고 있었구요.

마침 저와 다른 두분을 안내해주신 해설사 분이 일본유학을 하신 관계로 통역을 해주셨다는데 감방의 작은 공간에서 위생불량인 상태로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고 고통받은 것에 무척 가슴 아파하시고 안타까워하셨다고 하시면서 추모비 앞에 오셨을 때 전 총리분이 어떻게 하면 되냐고 한국에서 추모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지 물어보셨는데 일본에서 하시듯 하셔도 되고 편하게 하시면 된다고 해설사 분이 말했는데 일본에서는 추모할 때 무릎을 꿇고 하는대로 그렇게 했는데 언론에서 그거만 크게 부각시켜서 일본 전 총리가 와서 무릎꿇고 사죄한 것으로 되어서 무척이나 당황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잠깐이지만 그 순간에 그 곳에서 그 일본 전 총리 옆에서 안내하셨던 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왜 독재정권이나 식민지 점령을 하면 언론 먼저 장악하려는지 알겠더군요. 너무 쉽게 선동당해서 좀 부끄러웠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나오곤 내내 몸과 맘이 지치고 힘들었네요.

담장 밖을 나서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이 가장 크게 한숨 내뱉는 것였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독일의 디하우 수용소가 생각이 날 정도로 치를 떨고 몸서리 치다가 더는 할 것도 없을 정도로 깊은 슬픔과 아픔으로 먹먹하고 무거운 가슴을 치게 하네요.

잔인한 구타와 고문으로 몸과 마음, 영혼까지 다치셨을텐데도 그 안에서까지 독립을 외치던 분들께 감사해요. 살아나오셔서 끝까지 싸우셨던 독립운동가들도 물론이고  적국인 일본에서도, 타국인 만주에서도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에서도 독립을 위해 힘쓰신 분들께도 역시 감사해요. 진심으로...!

그렇게 먹먹한 마음으로 점심 때가 지나서 나왔는데도 점심 들 힘조차 없어 그대로 덕수궁 가는 길에 멀지 않은 곳에 암흑기에 아펜젤러 선교사님께서 세우신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 박물관이 있기에 들렸습니다.

 

 

 

미리 홈페이지방문으로 내부 사진촬영은  금지한다는 내용을 숙지했던 터라 내부사진은 없고 들어가기 전 외관 사진만 있네요. 시간만 잘 맞춰가면 무료 해설 안내를 받을 수 있어요.

문화재로 되어 있을 만큼 외관 못지 않게 내부도 근현대 건물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한 곳이에요.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까지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층과 2층에 전시관으로 꾸며놓았어요.

 

배재학당은 처음 아펜젤러 선교사님께서 문을 여셨을 때 고종 황제에게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집이란 뜻으로 배재학당이란 이름과 현판(현판은 전시되어 있어요)을 하사하였고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학교였고 신학문과 신앙교육을 병행했던 학교였어요.

 

수업 대부분이 영어로 수업하기도 하고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군을 기르려는 것보다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란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의지에 따라 나라 안에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라 밖으로 나가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죠.

우리가 잘 아는 분들을 말하자면 서재필 선생, 지정천 선생 , 이승만 전 대통령,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시인 김소월 등 많이 있지요. 배재학당 박물관에 가면 아펜젤러 선교사님께서 학교를 세우시면서 어떤 생각으로 하셨느지 알수 있고 당시 학당 교실을 볼 수 있고 실제 사용한 교과서나 발행한 교지, 물품들과 출신 위인들을 보기 쉽고 알기 쉽게 전시되어 있었고 당시 주요 건물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움직이면 방향이 바뀌어 그 건물로 가는 것같은 시물레이션으로 접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초창기부터 현재의 진행되고 있는 역사들을 담아두고 있는 곳이여서 좋은 방문이었어요 비록 큰 박물관에 비하면 볼 거리는 한정되어 있어도 감사한 마음을 능히 들었던 것 같아요.

 

근데 여기서마저 수행평가 때문에 방문했다는 아이들이...!!!-ㅅ-^ 결국 못참고 해설 안내 받기 전에 최대한 자제하며 이야기하려했지만 너희만 있는 곳이 아니고 공공장소인 만큼 최대한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고 버럭질을 해버렸네요.-_-;;  에휴~ 이눔의 승질머리란...!^^;;


그렇게 아픈 역사의 충격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워 나서기 힘들던 서대문 형무소와 다르게 다시 배움의 현장에 들어선 학생과 같이 들뜬 마음에 아쉬워서 쉽게 나오지 못 하고 있다가 어렵게 배재학당에서 나와서는 이러다가 안그래도 서대문에서 힘 뺀데다가 힘없다고 점심마저 안먹으면 ​쓰러질 것 같아서 결국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천천히 덕수궁으로 향합니다.

덕수궁으로 가는 내내 느낀 것이 바로 근현대의 시대에 와 있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는데요. 그것도 그럴 것이 정동에는 현대적인 세련된 빌딩과 건물도 있지만​ 근대적인 디자인의 건물들이 보이는 대부분일 정도 많더라구요.^^

그리고 가까운 곳에 서울에서 아주 오래된 교회로 당시 외국 선교사님들께서 세우신 정동제일교회가  있어서 많이 반가웠어요. 말로만 듣던 교회였기에 가봤어요. 근처 배제학당과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포함해서 교인들과 담임목사 및 장로들까지 3.1운동을 포함한 독립운동에 열혈하게 참가하는데 어쩔 땐 한동안 정상적인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독립운동을 모두 놓치지 않고 열심히 했다고 하네요.

 

​다른 교단이긴해도 예배나 채플을 드리면 한번씩 이름이라도 나올 정도로 표본이 된 모범 교회죠.

​해방 후에 분열이 된감리교단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결정적 역활을 하기도 하구요.

6.25 때 폭격으로 강단있는 곳, 파이프 오르간이 파괴 되었다고 하네요.

 

 

 

문화재가 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이 교회 건물이 참 이쁘고 안에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주일도 아니고 막무가내로 들어가볼 수 없어서 관계자가 있음 양해 구해서 들어가보려했는데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눈에 띄지 않아서 곁에서 빙빙 맴돌다가 그냥 덕수궁으로 향했네요.

 

 

낯선 사람에 서슴없이 브이를 하는 저 조무래기들은 스스럼없이 포즈도 취하고 들고있는 카메라를 보곤  "사진작가에요?" 라고 묻기도하고 무엇 땜에 왔는지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이 아이들이 저는 왜 더 이뻐보이고 배시시 웃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여길 지나고 어디론가 홀린 듯 정동을 걸어가고 있는데 이화여고인가? 그 어디 쯤에서 인도의 둔턱이 있을거라 생각을 못 하고 정동만의 풍경에 취해 있다가 철푸덕...!!

철푸덕도 그냥 철푸덕이 아니라 앞으로 슬라이딩 할 것도 아닌데 대(大)자로 엎어져서는 저도 놀라고 당황하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창피함에 몸둘 바를 모르고 옆에 있다가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해 놀란 인도에서 온 듯한 커플도 식겁해서 괜찮냐며 일으켜주고 소지품 챙기고 옷도 털어주며 괜찮냐고 놀라진 않았냐고 계속 안위를 물어주고 놀랬을 땐 단 것을 먹어주면 진정된다고 자신들의 가방이랑 주머니에 사탕을 몇개 찾아서 쥐어주면서 먹으라고 권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살짝 창피함도 있고 해서 얼른 한개 까먹고 나서 bye bye 할 수 있었네요.^^;;

진짜... 쥐구멍은 절실했는데도 어디에도 없었네요...!ㅜㅜ 

 

 

 

 

 

 

제가 방문했을 땐 국내인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50%할인해주는 중이라서 500원인가 내고 들어갔네요.^^

사실 앞서봤던 경복궁에 비하면 작고 볼 것이 별루 없어요

해봐야 석조전? 이것도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본다는...^^

  ​

 

 

 

 

오후 4시쯤 되어 가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궁궐 맞나? 싶을 만큼 조용하고 고즈넉합니다.

그러던 중 ​정관헌에 닿았네요.백과 사전이나 티비를 통해서 많이 접했어요.

오기 전에 가보라는 예시인지 서울 가기 전에 티비에서도 덕수궁 근처 숨은 곳 중명전인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고종이 이준, ​이상설, 이위종에게 친서를 주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가도록 했던 곳이 티비에 방영이 되어서 가보고자 했는데 그 곳을 못 찾아서 못 갔네요.^^;;

 

 

정관헌은 동,서양의 특징이 잘 섞인 건물이고 고종이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시던 곳이래요.

우연히 겹쳐서 지나듯 사람들을 이끌고 안내하던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설명에 따르면 고종이 덕수궁에 머물렀을 때 커피도 마셨던 곳이기도 하더군요

 

 

난간이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죠?

 

 

 

 

중화전도 경복궁의 근정전처럼 크고 웅장하지니 않아도 임금의 업무를 진행하는데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고 앞에는 양옆으로 역시 정, 종품 대신들의 자리를 알려주는 품계석이 서 있어서 경복궁이 왜란으로 소실되었을 때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궁으로서의 역활을 하는데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는 되어 있었어요.

 

 

 

 

 

 

 

 

 

 

당시에 드물게 큰 석조건물인 석조전은 그 면적과 크기도 무시못 할 뿐더러 그 웅장함과 세련됨에 입이 벌어지죠. 이 곳 역시 외관만큼이나 내부구조도 서방의 왕실 구조처럼 되어 있어서 왕실업무를 볼 수 있게 위엄을 갖추고 있고 해방 이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가 국적회복이 되고 들어왔을 때 임시 거처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죠.

 

예약을 못 하고 왔던 탓에 못 본 아쉬움이 큽니다.

최소한 못 해도 2,3 일 전에 미리 예약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 들어가 보고자한다면 꼭 예약을 해야할 것에요. 다음에 또 다시 서울에 오게 된다면 그땐 꼭 예약하고는 다시 들려서 석조전에 가보고파요.

 

남이 살던 곳은 뭐하러 들여다보고자 하냐고 뭐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적물인데 노력만하면 내부까지 볼 수 있는데 외관만 ​보고 봤다고 할 수 없어서 담기회에 방문하여 볼 것을 기약하는 거죠.

덕수궁을 마지막으로 나와서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다음날 중앙 박물관과 지난 3월 초, 절 가슴 시리게 만들었던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기다리고 있어서 물에 적은 것처럼 축 처져서 숙소로 갔지만 ​이날도 지출을 정리하고 다음날 할 것들을 체크하고는 씻고 누으니 새벽1시가 다 되어 가더군요.ㅜㅜ

또 새벽이야...!!ㅜㅜ 푹 자진 못 해도 피곤한 몸을 누의고는 쉴 수 있었어요.

참 박물관은 사진이 있어도 유물 밖에 없어서 포스팅할 것이 없네요. 나중에 노트르담 후기를 올릴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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