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행 2일째, 그동안 몇번이나 서울을 아니간 것이 아니였음에도 딜쿠샤를 꿈에서 알았던 것처럼 이야기만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다가 티비에서 자주 방문하는 것을 보고 진작에 양화진외국인 묘원처럼 알고 찾아가지 않았을까?하고 땅을 치고 후회하다가 이번에 가면서 근처에 동선을 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들을 다 정해서 다녀왔는데 그럼에도 빠진 곳이 있어서 아차~! 했지만.^^
딜쿠샤를 가는 길과 관람안내는 위와 같아요.
딜쿠샤가 있는 곳이 지대가 산등선을 깎아 만든 것처럼 경사가 좀 있어요. 이곳 근처에 이희영 기념관도 있어서 가는데 거기도 역시 경사가…!
제일 가까운 역인 3호선 독립문 역에서 지도상 12분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경사가 있으니 마을버스도 한대 있으니까 환승해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이날은 화창했던 날씨만큼이나 기분 좋은 맘으로 출발했어요.
딜쿠샤는 페르시아 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으로 엘버트 W. 테일러와 메리 L. 테일러의 집으로 당시에도 흔하지 않았던 적색 벽돌로 지어진 2층 가옥이에요.
지하도 1층이 있지만 지금은 기계실로 쓰이고 있는 듯해요.^^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30년에 재건되기도 하죠.
부부가 추방당하며 엘버트의 동생 윌리엄이 잠시 관리하다가 주인이 여러번 바뀌면서 본래의 모습이 바뀌었지만, 2005년에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가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T. 테일러의 의뢰를 받아 딜쿠샤를 찾아내었습니다. 2006년 브루스는 마침내 66년 만에 자신이 어린 시절에 살던 딜쿠샤를 방문하였고, 딜쿠샤는 그렇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집의 주인이었던 엘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엘버트 테일러는 광산기술자이셨던 아버지 조지 테일러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조선으로 입국하였죠. 아버지께서 소천하셨어도 조선을 떠나지 않고 광산과 테일러 상회를 운영하고 AP통신의 특파원으로도 일을 하며 일본에서 순회공연 와 있던 영국 여배우 메리 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마침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앨버트는 인도로 향하는 메리에게 곧 인도로 가겠다고 하고는 바로 인도로 향해 인도에서 결혼하고는 돌아와 회색 집이라고 불리던 신혼집에서 7년을 살면서 1923년에 시작해 24년 완공한 이 집을 지어 살게 되지요.
AP 통신의 한국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고종 국장과 3.1운동, 제임리학살 사건, 독립운동가의 재판등을 취재하여 세계로 소식을 전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했습니다.
더욱이 3.1운동은 당시 세브란스 병원 지하실에서는 3.1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던 곳 중 하나여서 일제가 이 사실을 알고 세브란스 병원에 들이닥치자 조선인 수간호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외국인 병실은 함부로 탐색하지 못할 것임을 판단하고 미국인 병실에 이를 숨겼는데 그곳이 메리가 막 출산을 마친 병실이었던 것이었던 거죠. 메리의 침상 밑에 숨긴 독립선언서를 병실에 방문한 앨버트가 발견하고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 순사의 눈을 피해 몰래 몸에 지니고 도쿄로 반출하여,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타전하면서 한국의 3·1 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당시 많은 외국인들이 추방당했는데 특히나 일제에 걸림돌같이 눈엣가시같은 이들이 더욱 더 심하게 안나갈 수 없게끔 괴롭혔는데 이때 조선/한국을 위해 애쓰던 선교사, 외교관 등의 외국인들이 탄압으로 추방당하거나 일제에 독하게 저항하다가 수감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테일러 부부도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앨버트는 6개월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보냈고, 부인 메리는 딜쿠샤에 가택연금되었죠.
42년 5월 조선 총독부에 의해 추방당했으며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던 앨버트는 한국이 독립하고 48년 6월에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고 아내 메리는 늘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테일러의 부친 조지 테일러와 함께 쉬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앨버트 -메리 테일러 부부는 앨버트는 사진이 취미라 사진으로 기록을 많이 남기고 메리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서 사람들을 포함 여러 그림들을 남기고 노년에 미국에서 엘버트와 지내면서 회고록을 작성하여 기록을 남겨준 덕에 복원할 때 그때의 모습에 최대한 비슷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그곳에 계시던 직원분에게 물으니 앨버트의 사진 찍는 취미 덕에 남은 사진들이 많아서 그렇게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현관 앞 테라스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안에 물건을 보존하기 위해 소지품들을 보관하도록 만들어진 사각 사물함에 소지품을 두고 현관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곳이 1층 거실이에요.
2층 거실에서는 가족들이 주로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었다면 1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하던 곳이라고 해요.
그들을 사진과 메모들을 기초로 복원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정말 가족을 위한 공간, 가족 외 외부인들을 맞이하는 공간이 잘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아요.
대구 청라언덕에 있는 선교사 사택들을 봐도 여기가 거실이었겠다, 여기가 응접실이었겠다 싶은 공간들이 있었고 50년대 쯤에 일제시대 활동하시고 한민족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저항하시던 탈메이지 선교사님의 막내 사위이셨던 브례문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으셨던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선교사님과 미국의 부호인 후원자의 도움으로 10 대 후반에 다리를 잃게 되고 잘못된 응급처치와 포항의 어느 양방 의원에서 대충한 수술로 클러치만 짚고 기술 배우러 다니는 아버질 도와주시기로 하셔서 고민 끝에 역시 청라언덕에 있는 선교사님 사택에 찾아갔을 때 부재중이신 선교사님 대신에 맞아주시던 부마리아 사모님이 맞아주시면서 어느 한 방에 데리고 가서 기다리게 하셨다는 걸 보면요.
군데군데 콘센트같은 것이 안보여도 천장에 전등이 있고 테이블 전등같은 것도 있는데 벽에 신기한 모양의 등이 달려 있어서 보니 생긴 건 서양 영화같은 걸 보면 나오는 것 같은 유등이랑 많이 비슷한데 전구가 있는 것을 보니 전기로 밝히는 등인 것 같아 긴가 민가 해서 거기 상주해 계시는 직원분에게 여기는 당시에 전기가 들어와서 전등으로 집 안을 밝혔냐, 그 중에 이건 유등처럼 생겼다고 하니 이제껏 그걸 알아보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며 말씀하신 유등을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요~. 저 눈썰미 좋고 손재주 좋으신 부모님의 딸 맞습니다~!^^
2층에 올라오면 방들 중에 사무실로 사용되거나 새로운 전시 기획 준비를 위해 사용되지 않고 닫혀 있는 방들이 있더라구요.^^
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여가시간을 보내는 주공간으로 알버트가 모은 것들로 장식했다고 해요.
병풍으로 여러 모양으로 가벽으로 공간 활옹했고 앞에 베란다를 티켈 테라스라 부르며 기둥위로 자란 등나무 덩굴이 포치 전체에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했데요.^^
창가에 그 당시 디자인 같은 의자가 있는데 앉아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잠시 앉아서 맞은편 거실을 보며 쉬는데 이 집에서 살았던 테일러 부부와 아이의 행복한 시간에 함께 하는 것 같이 함께 행복하고 즐겁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행복함에 왈칵 눈물이 맺혔는데 갑자기 왜 알 수 없는 행복함에 눈물까지 나는 걸까요?
1층에는 딜쿠샤의 건축특징이나 복원 전후의 모습 등 전시하는데 평소 엘버트의 취미이자 AP통신 특파원이란 직업 덕에 집과 주변, 생활 등을 담아둔 덕에 당시 시대상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집을 복원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정말 감사한 일이죠.
벽도 공동백 방식으로 독특하게 올렸고 영국과 미국의 양식을 적절히 잘 섞여 지어진 집이라 건축학적 사료로 연구하기 좋은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1926년 7월 26일 화재발생 하였고 1930년에 복구되었으며 추방될 때까지 잘 살았다고 해요.
공간마다 벽난로들이 있었고 보존 혹은 복원이 잘 되어 있었는데 복원이 된 1, 2층 거실 혹은 응접실의 벽난로는 앞에 팬스가 있어서 가까이 못 가봤지만 이 벽난로는 막힘이 없어서 가까이 가서 손을 굴뚝으로 향하는 곳에 넣어봤는데 지금 사용해도 되겠끔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이후에 주인이 몇번 바뀌고 국가 소유가 되었어도 관리를 안하니 들어와 사는 사람들의 사정에 따라 개증축을 하니 건물이 상하고 모양이 바뀐 것도 있는데 전시된 방 중에는 남겨진 사진이 없어서 복원되지 않은 상황에 벽난로가 있던 자리는 거실이나 저 벽난로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을 할 수 없어 벽난로가 있었다는 흔적만 남겨두었더라구요.
처음에는 이게 뭐지? 왜 이래 뒀을까? 싶어 궁금하다가 나중에 찾아보던 중에 이해할 수 있었죠.
일본 요코하마에서 처음 만난 테일러 부부.
앨버트는 준설기를 구입하기 위해, 메리는 연극배우로 순회공연 중이었던 관계로 일본에 와 있었는데 메리는 당시 남동생 에릭이 전사 했다는 슬픔에 빠쳐 있었습니다.
친구의 설득으로 극단 단원들과의 파티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그랜드 호텔에서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메리에게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메리는 회고록에서 이 호박 목걸이가 원산지가 조선이라고 하지만 실제 리투아니아 산이라고 해요.
앨버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인도로 떠나는 메리에게 자신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열 달 후 인도에서 재회합니다.
1917년 6월 인도 봄베이의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죠.
알버트는 광산일도 있지만 동생 윌리엄과 함께 테일러 상회와 골동품상회를 같이 하고 나중에 동생 윌리엄이 중화민국으로 영업 활동을 옮긴 1930년대 후반부터는 앨버트가 주로 맡아 운영하였어요.
테일러 상회는 생활용품, 사무도구, 건축자재 등 다양한 수입품을 들여와 팔거나 주문을 대행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판매와 수리, 배편 예약, 보험 판매, 영화 배급 등 다양한 업종하는 망라하는 종합무역상사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당시 N잡러인 알버트의 사진찍는 재능을 통해 주변환경이나 사람들을 찍고 남기며 앨범처럼 남기고 기록처럼 남겨놓은 것이 당시 시대상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죠.
아내 메리도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을 포함해서 환경을 그림을 그리며 그 또한 기록으로 남겨져서 주변 자연 환경과 사람들의 복장, 생활상 등을 짐작할 수 있지요.
이렇게 남겨진 사진이 없어서 복원되지 않은 벽난로의 흔적이 몇군데 남아 있었어요.
AP통신의 특파원이었던 만큼 고종 승하, 제암리 학살이나 자신의 아들 출산이후 아내의 침상에서 발견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동생 윌리엄을 동원하여 일본으로 반출해서 3.1운동을 미국으로 타전하는 등 조선에 발생한 큰일들, 일제의 만행들을 세계에 알리고 제암리 학살 때는 취재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부에 항의방문하는 등 한국 독립을 위해 적극 협조하며 애썼던 외국인 중 1명이죠.
그러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일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미 40년 말부터 미국인을 포함해서 많은 외국인들이 추방되거나 각국에서 자국 보호차원에서 본국 송환을 명하면서 대부분 이 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베델처럼 아주 옛날에 추방당하는 경우도 있, 초반에 말한 탈메이지 선교사님처럼 한민족을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 수감되어 고문까지 당함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봉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셔우드 홀 선교사님 내외나 윌리엄 린튼같이 그런 추방령으로 쫓가나가다시피 나가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일을 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을 위해 일을 했었는데 엘버트 테일러 부부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가택연금당한 뒤 결국 추방되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평소 "태평양 너머에 내 나라가 있고, 내 집이 있다", "When I die, please bury me next to my father in my beloved land of Korea.(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주시오.)" 라고 말한대로 1948년 6월 29일 미군정청 광업담당관으로 새 일을 하기 직전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별세하게 되요.
사후 그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 부인 메리 L 테일러가 성공회 헌트 신부님과 언더우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군함을 타고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앨버트를 묻고 딜쿠샤를 방문했었어요.
그렇게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자국, 자민족도 아닌데도 그렇게 한민족을 위해서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일해온 그들의 수고에 한동안 먹먹했습니다.
다 돌아보고 이제 나가야하는데 도저히 나갈수가 없었어요.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렇게 많이 행복했고 너무나 좋았고 즐거웠기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던 것이죠.
건물을 지을 때 건축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엘버트 테일러의 마음과 인도 북부 러크나우 지역 곰티 강 인근에 자리잡은 딜쿠샤 궁전[인도의 영국 식민지 시대에 영국인들이 세운 바로크식 여름 사냥 별장]에서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붙인 메리 테일러의 마음이 여기 이곳에 담겨져서 그것에 동화되어서 그랬나 봐요.
제가 오고 얼마 안되어서 서방국가에서 온 듯한 노년의 남녀분이 왔었는데 그들도 표정이 정말 편안하고 좋았는데 그들도 저와 같았겠죠? ^^
그런 중에 나도 모르게 "아, 가기가 싫다…!"는 말이 나왔고 그렇게 둘러보며 표정에서부터 아쉬운 것이 나오던 사람이 그러니 첨에 맞아주고 벽에 있는 유등을 개조했던 등을 보고 물었을 때 답해주었던 여직원이 미소 띈 얼굴로 여기 오시는 분들이 다들 그런 말을 하신다고, 그래서 여러번 오신다면서 언제든지 또 방문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꼭 오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던 사람이 언제든 다음에도 또 와달라고 초대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분의 배웅을 받으며 다음 행선지로 나왔는데 그 행복한 여운은 지금까지도 잔잔히 남아있어 행복합니다.
☆ 개인적인 방문기입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곰팅이 같아도 감수성 풍부하고 여린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가시기 전에 꼭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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