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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행 2일째, 그동안 몇번이나 서울을 아니간 것이 아니였음에도 딜쿠샤를 꿈에서 알았던 것처럼 이야기만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다가 티비에서 자주 방문하는 것을 보고 진작에 양화진외국인 묘원처럼 알고 찾아가지 않았을까?하고 땅을 치고 후회하다가 이번에 가면서 근처에 동선을 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들을 다 정해서 다녀왔는데 그럼에도 빠진 곳이 있어서 아차~! 했지만.^^

 

 

딜쿠샤를 가는 길과 관람안내는 위와 같아요.

딜쿠샤가 있는 곳이 지대가 산등선을 깎아 만든 것처럼 경사가 좀 있어요. 이곳 근처에 이희영 기념관도 있어서 가는데 거기도 역시 경사가…!

제일 가까운 역인 3호선 독립문 역에서 지도상 12분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경사가 있으니 마을버스도 한대 있으니까 환승해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이날은 화창했던 날씨만큼이나 기분 좋은 맘으로 출발했어요.

 

 

딜쿠샤는 페르시아 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으로 엘버트 W. 테일러와 메리 L. 테일러의 집으로 당시에도 흔하지 않았던 적색 벽돌로 지어진 2층 가옥이에요.

지하도 1층이 있지만 지금은 기계실로 쓰이고 있는 듯해요.^^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30년에 재건되기도 하죠.

부부가 추방당하며 엘버트의 동생 윌리엄이 잠시 관리하다가 주인이 여러번 바뀌면서 본래의 모습이 바뀌었지만,  2005년에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가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T. 테일러의 의뢰를 받아 딜쿠샤를 찾아내었습니다. 2006년 브루스는 마침내 66년 만에 자신이 어린 시절에 살던 딜쿠샤를 방문하였고, 딜쿠샤는 그렇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집의 주인이었던 엘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엘버트 테일러는 광산기술자이셨던 아버지 조지 테일러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조선으로 입국하였죠. 아버지께서 소천하셨어도 조선을 떠나지 않고 광산과 테일러 상회를 운영하고 AP통신의 특파원으로도 일을 하며 일본에서 순회공연 와 있던 영국 여배우 메리 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마침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앨버트는 인도로 향하는 메리에게 곧 인도로 가겠다고 하고는 바로 인도로 향해 인도에서 결혼하고는 돌아와 회색 집이라고 불리던 신혼집에서 7년을 살면서 1923년에 시작해 24년 완공한 이 집을 지어 살게 되지요.

AP 통신의 한국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고종 국장과 3.1운동, 제임리학살 사건, 독립운동가의 재판등을 취재하여 세계로 소식을 전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했습니다.

더욱이 3.1운동은 당시 세브란스 병원  지하실에서는 3.1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던 곳 중 하나여서 일제가 이 사실을 알고 세브란스 병원에 들이닥치자 조선인 수간호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외국인 병실은 함부로 탐색하지 못할 것임을 판단하고 미국인 병실에 이를 숨겼는데 그곳이 메리가 막 출산을 마친 병실이었던 것이었던 거죠. 메리의 침상 밑에 숨긴 독립선언서를 병실에 방문한 앨버트가 발견하고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 순사의 눈을 피해 몰래 몸에 지니고 도쿄로 반출하여,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타전하면서 한국의 3·1 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당시 많은 외국인들이 추방당했는데 특히나 일제에 걸림돌같이 눈엣가시같은 이들이 더욱 더 심하게 안나갈 수 없게끔 괴롭혔는데 이때 조선/한국을 위해 애쓰던 선교사, 외교관 등의 외국인들이 탄압으로 추방당하거나 일제에 독하게 저항하다가 수감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테일러 부부도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앨버트는 6개월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보냈고, 부인 메리는 딜쿠샤에 가택연금되었죠.

 42년 5월 조선 총독부에 의해 추방당했으며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던 앨버트는 한국이 독립하고 48년 6월에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고 아내 메리는 늘 한국을 그리워하던 앨버트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테일러의 부친 조지 테일러와 함께 쉬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앨버트 -메리 테일러 부부는 앨버트는 사진이 취미라 사진으로 기록을 많이 남기고 메리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서 사람들을 포함 여러 그림들을 남기고 노년에 미국에서 엘버트와 지내면서 회고록을 작성하여 기록을 남겨준 덕에 복원할 때 그때의 모습에 최대한 비슷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그곳에 계시던 직원분에게 물으니 앨버트의 사진 찍는 취미 덕에 남은 사진들이 많아서 그렇게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현관 앞 테라스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안에 물건을 보존하기 위해 소지품들을 보관하도록 만들어진 사각 사물함에 소지품을 두고 현관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곳이 1층 거실이에요.

2층 거실에서는 가족들이 주로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었다면 1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하던 곳이라고 해요.

그들을 사진과 메모들을 기초로 복원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정말 가족을 위한 공간, 가족 외 외부인들을 맞이하는 공간이 잘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아요.

 

대구 청라언덕에 있는 선교사 사택들을 봐도 여기가 거실이었겠다, 여기가 응접실이었겠다 싶은 공간들이 있었고 50년대 쯤에 일제시대 활동하시고 한민족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저항하시던 탈메이지 선교사님의 막내 사위이셨던 브례문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으셨던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선교사님과 미국의 부호인 후원자의 도움으로 10 대 후반에 다리를 잃게 되고 잘못된 응급처치와 포항의 어느 양방 의원에서 대충한 수술로 클러치만 짚고 기술 배우러 다니는 아버질 도와주시기로 하셔서 고민 끝에 역시 청라언덕에 있는 선교사님 사택에 찾아갔을 때 부재중이신 선교사님 대신에 맞아주시던 부마리아 사모님이 맞아주시면서 어느 한 방에 데리고 가서 기다리게 하셨다는 걸 보면요. 

군데군데 콘센트같은 것이 안보여도 천장에 전등이 있고 테이블 전등같은 것도 있는데 벽에 신기한 모양의 등이 달려 있어서 보니 생긴 건 서양 영화같은 걸 보면 나오는 것 같은 유등이랑 많이 비슷한데 전구가 있는 것을 보니 전기로 밝히는 등인 것 같아 긴가 민가 해서 거기 상주해 계시는 직원분에게 여기는 당시에 전기가 들어와서 전등으로 집 안을 밝혔냐, 그 중에 이건 유등처럼 생겼다고 하니 이제껏 그걸 알아보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며 말씀하신 유등을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요~. 저 눈썰미 좋고 손재주 좋으신 부모님의 딸 맞습니다~!^^

 

 

2층에 올라오면 방들 중에 사무실로 사용되거나 새로운 전시 기획 준비를 위해 사용되지 않고 닫혀 있는 방들이 있더라구요.^^

 

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여가시간을 보내는 주공간으로 알버트가 모은 것들로 장식했다고 해요.

병풍으로 여러 모양으로 가벽으로 공간 활옹했고 앞에 베란다를 티켈 테라스라 부르며 기둥위로 자란 등나무 덩굴이 포치 전체에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했데요.^^

 

 

창가에 그 당시 디자인 같은 의자가 있는데 앉아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잠시 앉아서 맞은편 거실을 보며 쉬는데 이 집에서 살았던 테일러 부부와 아이의 행복한 시간에 함께 하는 것 같이 함께 행복하고 즐겁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행복함에 왈칵 눈물이 맺혔는데 갑자기 왜 알 수 없는 행복함에 눈물까지 나는 걸까요?

 

 

1층에는 딜쿠샤의 건축특징이나 복원 전후의 모습 등 전시하는데 평소 엘버트의 취미이자 AP통신 특파원이란 직업 덕에 집과 주변, 생활 등을 담아둔 덕에 당시 시대상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집을 복원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정말 감사한 일이죠.

 

벽도 공동백 방식으로 독특하게 올렸고 영국과 미국의 양식을 적절히 잘 섞여 지어진 집이라 건축학적 사료로 연구하기 좋은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1926년 7월 26일 화재발생 하였고 1930년에 복구되었으며 추방될 때까지 잘 살았다고 해요.

 

 

공간마다 벽난로들이 있었고 보존 혹은 복원이 잘 되어 있었는데 복원이 된 1, 2층 거실 혹은 응접실의 벽난로는 앞에 팬스가 있어서 가까이 못 가봤지만 이 벽난로는 막힘이 없어서 가까이 가서 손을 굴뚝으로 향하는 곳에 넣어봤는데 지금 사용해도 되겠끔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이후에 주인이 몇번 바뀌고 국가 소유가 되었어도 관리를 안하니 들어와 사는 사람들의 사정에 따라 개증축을 하니 건물이 상하고 모양이 바뀐 것도 있는데 전시된 방 중에는 남겨진 사진이 없어서 복원되지 않은 상황에 벽난로가 있던 자리는 거실이나 저 벽난로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을 할 수 없어 벽난로가 있었다는 흔적만 남겨두었더라구요.

처음에는 이게 뭐지? 왜 이래 뒀을까? 싶어 궁금하다가 나중에 찾아보던 중에 이해할 수 있었죠.

 

 

일본 요코하마에서 처음 만난 테일러 부부.

앨버트는 준설기를 구입하기 위해, 메리는 연극배우로 순회공연 중이었던 관계로 일본에 와 있었는데 메리는 당시 남동생 에릭이 전사 했다는 슬픔에 빠쳐 있었습니다.

친구의 설득으로 극단 단원들과의 파티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그랜드 호텔에서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메리에게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메리는 회고록에서 이 호박 목걸이가 원산지가 조선이라고 하지만 실제 리투아니아 산이라고 해요.

 

앨버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인도로 떠나는 메리에게 자신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열 달 후 인도에서 재회합니다.

1917년 6월 인도 봄베이의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죠.

 

 

알버트는 광산일도 있지만 동생 윌리엄과 함께 테일러 상회와 골동품상회를 같이 하고 나중에 동생 윌리엄이 중화민국으로 영업 활동을 옮긴 1930년대 후반부터는 앨버트가 주로 맡아 운영하였어요.

테일러 상회는 생활용품, 사무도구, 건축자재 등 다양한 수입품을 들여와 팔거나 주문을 대행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판매와 수리배편 예약보험 판매영화 배급 등 다양한 업종하는 망라하는 종합무역상사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당시 N잡러인 알버트의 사진찍는 재능을 통해 주변환경이나 사람들을 찍고 남기며 앨범처럼 남기고 기록처럼 남겨놓은 것이 당시 시대상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죠.

 

 

아내 메리도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을 포함해서 환경을 그림을 그리며 그 또한 기록으로 남겨져서 주변 자연 환경과 사람들의 복장, 생활상 등을 짐작할 수 있지요. 

 

 

이렇게 남겨진 사진이 없어서 복원되지 않은 벽난로의 흔적이 몇군데 남아 있었어요.

 

 

AP통신의 특파원이었던 만큼 고종 승하, 제암리 학살이나 자신의 아들 출산이후 아내의 침상에서 발견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동생 윌리엄을 동원하여 일본으로 반출해서 3.1운동을 미국으로 타전하는 등 조선에 발생한 큰일들, 일제의 만행들을 세계에 알리고 제암리 학살 때는 취재하고 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부에 항의방문하는 등 한국 독립을 위해 적극 협조하며 애썼던 외국인 중 1명이죠. 

 

 

그러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일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미 40년 말부터 미국인을 포함해서 많은 외국인들이 추방되거나 각국에서 자국 보호차원에서 본국 송환을 명하면서 대부분 이 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베델처럼 아주 옛날에 추방당하는 경우도 있, 초반에 말한 탈메이지 선교사님처럼 한민족을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 수감되어 고문까지 당함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봉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셔우드 홀 선교사님 내외나 윌리엄 린튼같이 그런 추방령으로 쫓가나가다시피 나가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일을 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을 위해 일을 했었는데 엘버트 테일러 부부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고 가택연금당한 뒤 결국 추방되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평소 "태평양 너머에 내 나라가 있고, 내 집이 있다", "When I die, please bury me next to my father in my beloved land of Korea.(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주시오.)" 라고 말한대로 1948년 6월 29일 미군정청 광업담당관으로 새 일을 하기 직전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별세하게 되요.

사후 그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 부인 메리 L 테일러가 성공회 헌트 신부님과 언더우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군함을 타고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앨버트를 묻고 딜쿠샤를 방문했었어요.

 

그렇게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자국, 자민족도 아닌데도 그렇게 한민족을 위해서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일해온 그들의 수고에 한동안 먹먹했습니다.

 

다 돌아보고 이제 나가야하는데 도저히 나갈수가 없었어요.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렇게 많이 행복했고 너무나 좋았고 즐거웠기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던 것이죠.

건물을 지을 때 건축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엘버트 테일러의 마음과 인도 북부 러크나우 지역 곰티 강 인근에 자리잡은 딜쿠샤 궁전[인도의 영국 식민지 시대에 영국인들이 세운 바로크식 여름 사냥 별장]에서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붙인 메리 테일러의 마음이 여기 이곳에 담겨져서 그것에 동화되어서 그랬나 봐요.

제가 오고 얼마 안되어서 서방국가에서 온 듯한 노년의 남녀분이 왔었는데 그들도 표정이 정말 편안하고 좋았는데 그들도 저와 같았겠죠?  ^^

 

그런 중에 나도 모르게 "아, 가기가 싫다…!"는 말이 나왔고 그렇게 둘러보며 표정에서부터 아쉬운 것이 나오던 사람이 그러니 첨에 맞아주고 벽에 있는 유등을 개조했던 등을 보고 물었을 때 답해주었던 여직원이 미소 띈 얼굴로 여기 오시는 분들이 다들 그런 말을 하신다고, 그래서 여러번 오신다면서 언제든지 또 방문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꼭 오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던 사람이 언제든 다음에도 또 와달라고 초대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분의 배웅을 받으며 다음 행선지로 나왔는데 그 행복한 여운은 지금까지도 잔잔히 남아있어 행복합니다.

 

 

 

 

 

 

 

☆ 개인적인 방문기입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곰팅이 같아도 감수성 풍부하고 여린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가시기 전에 꼭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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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행하는 첫날 짐을 주렁주렁 달고 가려다가 너무 강행군이라서 숙소에서 몇만원 더 주고 일찍 체크인하고는 예정했던 전쟁기념관에 다녀왔어요.

가는 길이 왜 이리 헷갈리는지…. >_<

 

 

오던 길과 달리 국방부가 있는 곳 앞으로 와서 광장을 통해 들어올 수 있었는데 전 손 안에 작은 지도를 따라 왔더니 주차장있는 곳으로 들어왔더라구요.

올라와서 광장을 보니 둥근 광장들 가장자리로 국기들이 있는데 태극기와 함께 한국전쟁 때 도와준 국가들 위주로 있더라구요.^^

 

 

입구를 마주해서 오른쪽에 있는 화랑을 따라 쭉~! 한국 전쟁 때 참전국의 전사자, 부상자와 베트남전 참전했던 한국군 전사자, 부상자들의 명단들이 있어요.

회랑을 따라 가서 맨 밑에 층부터 차근차근 관람했어요.

 

 

3,4층 정도 되는 건물 맨 아래층에는 우리 나라 기념적인 군사용 배인 거북선을 재현해둔 배가 있는데 안에도 텅텅 비어 있다기 보다는 당시 모습을 재현되어 있음을 대포 발사할 수 있는 곳이 열린 틈 사이로 봤을 때 볼 수 있었어요.

 

 

거북선을 둘러서 있는 전실에는 청동기 시절쯤부터 삼국시대, 통일 신라-발해시대까지의 이야기들이 설명되어 있었어요. 

그동안 어디 가던 박물관이나 역사적인 장소들을 한군데라도 꼭 찾아가는 편인데 서울이나 부산을 가게 되면서 중앙 박물관이나 부산 박물관도 가보고 지금이야 울산에도 지역 박물관이 있지만, 어릴 때부 자주 가던 박물관이 경주 박물관이었고 신라에 대한 이야기에 편중되어 있었고 무기나 갑옷 등을 볼 수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보다보니 다양하게 볼 수 있었고 중앙박물관도 지역색을 떠나 더 큰 종합 박물관?? 그랬으니까요.

반면 전쟁기념관은 전쟁에 관한 거, 유엔 평화기념관이면 한국전쟁과 유엔군의 활동 등을 볼 수 있고 국립 강제동원역사관이면 일제시대의 수탈과 피해, 그리고 그에 대한 피해복원을 위해 어떻게 애써왔는지 등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처럼 한 분야에 깊게 볼 수 있는 있으니 전쟁이란 분야이지만 삼국시대와 발해, 고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보지 못 하고 알지 못 했던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반도는 진짜 작은 땅덩이인데도 무슨 전쟁이 그리 많이 있었는지, 조선 이전에도 고구려가 만주벌판 너머로 뻗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들끼리 영역싸움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고구려는 허구헌날 중국 및 위쪽 지역 나라들과 싸우고 신라는 허구헌날 일본 쪽에서 쳐들어오고, 고려 때는 몽골에서 치여 중국에 치여 왜적이 안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치였으면 조선에서는 좀 편해야하는데 호란, 왜란으로 진짜…!^^;

 

 

그러다 마지막엔 양요에 먼저 근대개화된 일본이 쳐들어와서 결국 일본에 굴욕적으로 복속되니 한반도에서 속 시끄럽지 않았던 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참 비참한 사건인데 아무리 못난 지도자라도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지 다른 나라의 자객들이 밤중에 쳐들어와서 한나라의 왕과 왕비를 쳐참하게 권위를 무너뜨리고 위협하거나 죽이고 욕보이는 일이 발생하는 일은 그 나라를 엄청 개무시하고 지독하게 선넘은 일이죠. 그럼에도 떳떳하지 않으니 쉬쉬하며 숨기고 거짓말하는 부분이 되겠죠.

일본은 이 사건을 축소, 왜곡하여 이야기했겠지만, 해외에도 뉴스가 타진되어 나간 것이 있고, 당시 조선, 대한제국에 있는 외국인들 중에 친일 계열이 아닌 그래도 일제의 부당함을 알고 밝히고 조선의 편에서 일하던 이들의 목숨건 행보로 밖으로 일본의 만행이 전해지기도 했지요.

 

 

뒤늦게 주권을 가진 근대 국가의 위상을 지닌 나라로 표명하고 발맞춰 나가려고 했으나 많이 늦었고 맥을 잘못 짚은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모양이라도 갖추던 것 중에 군대를 서양 군대를 표방하여 만드는 것이 있지요.

난 왜 저 군복을 미스터 션샤인에서 정희성이 후대 대대로 매국노로 남아야 할 위인들로 을사오적, 정미칠적인 역적들의 사진을 찍을 때 그들이 입은 옷들과 비슷해서 어찌나 화가 나던지…! (┬┬﹏┬┬)

 

 

그 군대마저도 일본의 더러운 야옥에 해산이 되고 주권도 뺏기다시피했지만요.

이후로 능욕적인 일들을 겪지요.

 

역시 미스터 션샤인에서 프랑스 첩자로 일본에 정보를 빼돌리던 프랑스 공사관 직원을 정삼문 대감에게 내어 주면서 유진 초이가 했던 " 전쟁을 해보면 말입니다.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도, 어떤 포수도, 지키고자 아등바등한 조선이니, 빼앗길지언정 내어주진 마십시오."란 말처럼 타의던 자의던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자 애쓰는 이들의 노력들이 있지요.

 

 

많은 이들의 독립운동 중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관련해서 전시되어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과 저서들도 있고 당시 사용했던 총과 관련 판화도 전시되어 있지요.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희성이 글에는 힘이 없다는 애신에게 글에도 힘이 있다고 누군가가는 기록해서 남겨야하지 않냐는 말처럼 누군가의 기록들이 남아서 그날의 일들을 전달되고 전해지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맨손으로,  때론 무력으로, 누군가는 국내에서, 누군가는 해외에서 그렇게 애쓴 끝에 시가가 맞아 독립을 했어요.

독립을 한지 했으나 남북으로 이념에 의해 갈등이 생기고 결국 일어나지 말아야할 한국 전쟁도 발생합니다. 

이 이후론 한국 전쟁에 대한 전시가 이어져요.

 

 

한국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중에 피난가고 치열한 격전과 학도병 동원 등의 모습이 재연되어 있어요.

거제 포로수용소처럼 너무 리얼하게 재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마네킹의 위치나 포즈, 움직임 등으로 인해 화들짝놀라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긴 했지만요.^^;;;

 

 

서울을 뺏기고 탈환하기를 반복할 정도로 엎치락 덮치락하면서 휴정 협정 협의하는 중에도 전쟁 중이었고, 피해가 컸었죠.

 

독립운동차원에서 무력으로 하는 독립운동 보고도 많은 생각을 하지만, 한국 전쟁 섹션에서 정말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한 벽에는 사진들이 모여있었는데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참전 군인들이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면서 오는 중의 모습과 상황에서 오는 많은 감정들을 담겨있는 모습들이 담겨 있고 전쟁고아나 아이들을 신경쓰는 연합군들을 볼 수 있었지요.

여기 있는 사진 중에 전쟁고아인 아일라와 튀르키예 군이 함께 있는 사진이 있는데 영화 관련 종편방송에서 보고 한국-튀르키예 합작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되고 찾아보니 실화이더라구요.^^ 옛날 공중파 방송으로도 나왔더라구요.^^ 아직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이야기는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일라와 튀르키예 군과 함께 있는 사진 몇장을 보고 한참을 보왔던 것 같아요.

 

 

부산에 UN기념공원 쪽에 유엔군 묘원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한국 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은 자국군인은 전사자던 부상자던 생존자던 자국으로 어떻게던 자국으로 데려가는 미국의 성격상 남아있는 미군 묘 수는 적고, 전쟁 발발한 1951년에서~1954년 사이에 유엔기념공원에는 유엔군 전사자 약 11,000여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필리핀, 태국 7개국 용사의 유해 전부와 그 외 국가의 일부 유해가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어, 현재 11개국 2,320구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고 해요.

마음이 한구석에 몽글몽글 알 수 없는 감사한 마음들이 강했어요. 여담이지만 부산에 있는 유엔 기념공원과 조금 떨어진 곳에 국립 일제강제동원 역사관과 함께 있는 유엔평화기념관에 함께 가봤으면 좋겠어요.교육적으로도 방문하는 것이 좋은 곳들이고 역사적으로 유익한 곳이니까요.

 

 

파병과 의료지원국의 군복과 옷, 관련 물건들을 전시된 섹션에서는 고마움도 고마운 거지만, 울컥하는 속상함도 함께 있더라구요.

작년 가을쯤에 다녀온 부산 유엔 평화 기념관에서 이와 같은 섹션을 먼저 봤었는데 당시에 군복들을 보면서 이역만리 잘 알지도 못 하는 작은 나라에 와서 목숨내어놓고 싸우고 의료적인 지원을 하던 이들인데 아무리 당시 지금만큼 물질적으로 좋거나 풍요하지 않은 시기이지만 제대로 된 보급품들을 지원 받고 군복이… 너무 좋아보여서 마지막에 한국군 군복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허술해보여서 너무나 목이 매이고 속상하다 못 해 화가 날 정도였는데 나중에 한국전쟁을 유아, 아동기 때 겪으셨던 80대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전쟁 때 의료지원을 위해 온 사람들의 옷이나 파병되었던 군인들의 군복들과 보급품들이 좋아보이던데, 하다 못 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에서 파병한 군인들 것들도 그렇게 좋아보이는데 마지막에 한국군의 군복이며 보급품의 수나 질이 왜 그렇게 떨어지고 초라해보이던지 너무 속상했다는 제 푸념같은 말에 아버지께서 당시 그만큼 못 먹고 못 살던 시기에 전쟁이 났는데 잘 사는 나라에서 오는 군인들은 얼마나 지원이 잘 되었을 거며 자국 국인들은 그만큼 지원이 안되었겠냐, 다 그런 거라고, 그래서 국력을 무시 못 하는 거고, 나라가 힘이 있고 부강해야하는 거라시는 말을 하시더라구요.

 

1년여 만에 장소만 달리해서 마주한 의료지원 및 파병국가의 보급품과 의류들을 마주했을 때 새삼 같은 감정으로 보는데 서글픔이 있더라구요.

 

나라의 힘도 필요하고 잘 살아야하는 것도 있어야하는데 지금도 그때보다 더 살기 좋아졌음에도 군인이라면 대접하고 지원하는 미국과 달리 너무나 대우을 못 하는 한국인데 옛날은 참…! 어려운 시기에 더 대우를 못 해주고 초라함에 후손으로서 속상함이 극대화되는 건 내 몫이니…!

부디 군국주의, 제국주의는 싫고 법보다 총칼이 먼저 가는 것은 지양하는 나지만 그래도 자기 꽃다운 인생의 일부를 국방의 의무로 희생하는것인데 그들 덕에 후방에서 다리 뻗고 사는 걸 생각한다면 군내 기강은 좀 쎄게 잡더라도 대우는 좀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좀 크네요. 좆같은 시간이라고 침뱉고 욕하는 기억으로만 있는 것이 아닌 그런 기간이었어도 이런 거라도 있으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싶을 만큼 지원이 되고 부상병, 전사자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지원이 되었으면 싶은 마음은 있어요. 

2번의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피격이나 이런 걸 볼 때 빡침이 없던 것이 아니니까요.

 

 

전쟁 중에도 재건과 학업에 대한 열의는 대단한 한국인이고 그 안에서 유엔군 및 파병온 군인들이 와서 전쟁하는 와중에도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고아원을 만들어 수용했고 천막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물품을 지원하는 것은 있었죠.

 

그것이 대한민국이 살아나고 지금의 위치로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겠죠.

그건 잊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해요.

남의 나라 전쟁에 우리가 왜 연류되어 생명까지 위협받아야하냐고 한다면 이때를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오후 2시 안되서 와서는 관람을 했는데 늦게 왔었나?

폐관이 6시인 걸로 알고 갔는데 5시 좀 지나고 나니까 더이상 당일 관람객 입장은 마무리되었다는 안내를 시작으로 10~20분간격으로 폐관 준비하고 있으니 안에 있는 관람객들은 다음에 방문하는 걸로 하고 관람을 끝내고 퇴징해주길 바란다는 안내가 계속되어서 결국 전시물을 얼마 남기지 않고 나왔어요. 

거의 다 보고 나왔던 거라 아깝지는 않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마져 다 보지 못 하고 부랴부랴 최대한 많이 보고 나오려고 급히 훝듯이 보고 이렇게 떠밀리듯이 나오는 것이라 아쉽더라구요.

 

그렇게 나오면서 전쟁기념관에 형제의 상과 복제된 제 2 연평해전 때 격전했던 고속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갔지요.

 

 

전쟁기념관 한켠엔 서로 다른 군복을 입고 얼싸 안고 있는 동상이 있어요.

형제의 (동)상은 한국전쟁 당시에 각각 한국군과 인민군이 되어 적으로 만나게 된 형제의 비극을 작품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해요.

총을 어깨에 맨 장교가 형 박규철 소위로, 한국군 제8사단 제16연대 소속이며, 인민군 복장을 한 동생은 북한군 제8사단 제83연대 소속으로 참전한 동생 박용철 하전사로, 형제는 원주 치악고개 전투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전투 중에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았고, 서로에게 겨눈 총을 거두고 얼싸 안았다고 하죠.

 

45년 해방되고 황해도가 북의 치하에 들어가면서 과수원을 하고 있던 이 두 형제의 집은 지주계급이란 이유로 과수원이 뺏기게 되고 아버님이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형은 남한에 가서 공부를 더 하길 원해서 아버님께 허락해달라고 하고는 동생 용철에게는 부모님과 여동생 박금희를 부탁하고 남하했는데 그때 박용철의 나이는 20세가 되기 전이었다죠.

박규철은 남하해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에 가입했고, 국군에 자원입대했는데, 6·25가 발발하자 그는 일등상사로 전선에 투입되었고, 소대장이 부상으로 후송되자 소대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고향 황해도에 남아 있던 동생 박용철은 북한군에 강제징집되어 북한군에 하전사로 배치되었구요.

 

전쟁이 치열하던 어느날, 형의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나 “불효자식놈”이라고 호통을 쳤고, 그는 꿈에서 깨어나 엉엉 울게 되죠.

그 다음날 치악산 고개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박규철 소위가 이끄는 소대가 인민군을 추격하는데, 5~6m 전방에 도망치던 어린 나이의 인민군 하나가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박 소위는 인민군 병사를 생포하겠다는 생각으로  "죽이지 않을테니 도망가지 말라."고 소리지르며해 인민군 병사을 추격하는데 그 소리 듣고 고개돌리는 적병의 얼굴을 보니 바로 고향에 두고 온 자기 동생이더래요.

박규철 소위는 “너 박용철 아니냐”고 소리치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컸던지 그 소리 듣지도 못 한 동생 박용철은 도망치기 시작하자 박규철 소위은 뒤따라가며 “용철아, 나야, 니 형이야! 형.”이라고 소리쳤지만, 박용철은 계속 도망치다가 경사지에서 나무 뿌리에 걸려 쓰러지게 되죠.

 

동생 용철이 일어나려고 하자 그 순간 박규철 소위는 몸을 날려 동생의 몸을 덮치고는 “너 박용철이지?”라고 하자, 그 소년병은 “네”라고 대답하는데 박규철 소위는 “내가 니 형 규철이라고 하는데 왜 도망쳐”라고 하죠.

그 소리에 동생은 형을 알아보았고 형제는 서로를 끌어 안게 되죠.

형 규철은 동생을 끌어안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서 복귀하자 소대원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하는데 박 소위는 소대원들에게 이 인민군이 자신의 친동생이라고 밝히게 됩니다. 이에 소대원들은 형제의 만남을 축하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동생 박용철은 형이 소속한 부대의 배려로 국군으로 현지에 입대해 형과 함께 근무했다고 하죠.

형제의 사연은 치악고개 전투에 참여했던 안만옥씨가 1989년 전쟁기념사업회가 주관한 한국전쟁 참전 수기 공모전에서 입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윤성진 조각가 등이 '형제의 상' 조형물을 제작해 전쟁기념관 개관과 함께 전시하게 되었고 이 이야기는 천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요.

 

대학시절 태극기 휘날리며란 영화가 개봉되면서 처음엔 18세 미만 관람불가였나 그러다가 최종 등급이 청소년 관람불가가 되었는데 보면서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구요. 사상, 이념의 갈등에서 오는 무서움, 전쟁의 잔인함, 그로 인해 민간인들의 고통 등 전쟁을 겪으셨던 어른들께서 하셨던 말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었기에 그 잔혹함이 너무 무섭게 다가왔었으니까요.

 

 저 동상의 주인공 형제들은 서로가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을까요? 그리고 형은 그렇게 두고 와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온 동생에게 얼마나 미안했을지, 동생은 자신과 가족을 그렇게 두고 떠난 형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그래도 만나서 형제가 함께 북으로 휩쓸려가지 않고 한팀으로 싸울 수 있어서 더 든든했을 것 같아요.

 

 

형제의 상 반대편 야외 전시장에는 각종 전투기와 탱크 등이 전시되어 있어요.

그 중에 2002년 월드컵 기간에 남침한 북한 해군 경비정의 기습으로 대응 공격한 참수리정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어요.

 

 

격전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총탄 자국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더라구요.

보면 얼마나 치열했을지 알 수 있죠.

고속정에 올라가볼 수 있던 것 같은데 관람시간이 꽉 차서 그러지는 못 했어요.

 

 

말하면 나이가 드러나는데 2000년 첫 월드컵 학번으로 이때는 대학 신입생이고 일본과 공동이긴해도 한국에서 하는 첫 월드컵으로 국가적으로 분위기가 들석이면서 들떠있었던 관계로 뉴스도 이 분위기에 묻혀서 당시에는 크게 뜨지 않았던 걸로 기억을 해요. 당시에 자취방에는 티비나 컴퓨터가 없었고 학교 식당 한켠의 티비나 학교 컴퓨터 랩실이 아니면 근처 PC방아니면 소식을 접할 방법이 없던 관계로 나중에 인지를 했었을거에요.

 

이때 정장이시던 이후 소령으로 추서된 윤영하대위 포함 6명 전사, 19명 부상에 고속정을 오는 중에 침몰했지만, 북한은 13명 전사, 25명 부상에 경비정은 반파되어 자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북한군 배에 예인되어 갔다니까 결과론적으로는 남한 승이죠. 근데 이후 부상자들과 가족 및 유족들이 억울하고 화가 나는 국가와 원수의 대응들로 좀 빡침이 있던 건 사실 아닌 사실인 거죠. 

 


이대로 나온 것이 많이 아쉬움이 남았어요.

나오면서 그냥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바로 안가고 짐을 이고 지고해서 그냥 바로 왔으면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커다란 캐리어에 무게감이 있는 배낭에 카메라까지 들고 낑낑거리고 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힘이 빠지고 더 늦고 힘들어서 더 제대로 못 봤을 것 같아요.

 

전쟁관련해서 역사를 접하면서 지금은 휴전 중인 한국이긴 하지만, 지금도 어떤 지역은 내전 중이거나 다른 나라로 침공해서 전력으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적인 영향을 안받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시국에서 그래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한국 전쟁으로 외면해도 원망은 해도 욕을 못 할 상황에 명령이라고 해도 와서 목숨을 걸고 평화 수호를 위해 했던 이들 덕분에 숙연해졌던 날이었어요.

 

비록 한나라였던 곳이 두 나라로 나뉘게 되었지만, 이 나라와 평화를 지켜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이 평화는 거져 얻어지는 것은 아니였음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 개인적인 방문기입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곰팅이 같아도 감수성 풍부하고 여린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가시기 전에 꼭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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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배려로 쉬기 위해 10월 10일, 11일 1박 2일 부산여행하면서 작년에 당일치기로 왔었다가 못 가본 곳들을 가보려고 찾았는데 하필이면 전날이 한글날이었고 쉬는 날이었다보니 자연스럽게 역사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들이 죄다 월요일이었던 한글날에 운영하고 화요일날 거의 다 쉬는 통에 가볼만한 곳이 잘 없었어요.

 

그렇게 찾던 중에 지금 문화공간 수정이란 이름으로 관리가 되고 예전엔 정란각이란 고급 요릿집이자 요정이운영되었던 부산 수정동 일본식 가옥이 가기 전날까지 지켜봤는데 원래 쉬는 날인 월요일날 쉬고, 가는 날이던 화요일은 운영하기에 그날 바로 가기로 했습니다.

 

 

이용시간이 짧은 편이긴하지만 보존이 잘된 적산가옥의 일본 건축 양식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건축학적, 사(史)적인 자료이기에 가서 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입장료는 따로 없고 월요일날 월요일이 휴관일이니 시간에 맞춰서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해요.

 

 

부산 수정동 일본식 가옥[ Japanese-style House in Sujeong-dong, Busan , 釜山 水晶洞 日本式 家屋 ]은 독립전인 1943년에 섬유 공업 및 무역회사릉 운영하던 일본인 사업가인 다미다미노루(玉田穰)가 지은 2층 목조 건물로 넓은 대지에 남향으로 향한 맞배지붕의 3칸 대문과 본채로 구성된 2층 목조 건물이에요.

몸채 현관의 오른쪽은 벽돌(조적조)로 지어져 있으며 이를 제외한 대부분은 일본식 목조 주택으로 지어져 있는데 일본 무사계급이 사용한 일본식 서원 건축 양식인 쇼인즈쿠리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민간으로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부엌과 정원 등이 새로 조성되었고, 1970년대에는 본채의 뒷편과 오른편 1층 처마 밑에 콘크리트 건물이 증축되어 고급음식점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음식점이 바로 아이 알려진 정란각인 걸 짐작할 수 있죠.

 

1991년 11월에 본채의 왼쪽 토지 일부가 매각되서 연못과 정원이 대폭 축소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연못이 잘라져서 작아지고 연못으로서의 기능을 못 하게 되면서 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어요. 

 

 

민간인에게 넘어가면서 일부 매각되어 흔적만 남은 연못이며 정원 구성이 일본의 정서가 남아 있어요.

잘 남아 있었다면 제법 넓은 부지에 일본적인 색채가 강한 건물이었을 것 같아요.

 

 

밑에 비가 오거나 그러면 물이 흘러갈 수 있는 수로같은 것도 만들어져 있는 걸 보고 신기하기도 했어요.

많은 고택이나 건물들을 보러 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택들을 그닥 적게 본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작은 수로가 되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어요. 

 

현관말고도 나무 복도를 통해서도 왕래가 가능할 수 있도록 디딤돌과 수로를 건널 다리 역할할 돌이 놓여 있더라구요.

 

 

현관을 지나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긴 했지만, 관람특성상 막아두고 건물 안 공간 한칸을 관장실로 쓰이게 되면서 입식 안내문을 몇개 두어 막아두었고 바로 일직선으로 바로 들어가면 되었어요.일본 드라마나 영화같은데서 보던 고민가로 보던 일본 집 양식처럼 다다미방 들어가기 전 입구에 툇마루가 있는데 맨들맨들 닳은 나무가 정감이 가는 툇마루였네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데 다다미 방으로 들어가니 발에 닿이는 다다미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어요. 

입구 옆에 관람할 수 있는 안내 입간판이 있는데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해요. 

 

 

다다미와 나무 복도가 혼재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본 주거 양식의 일부를 볼 수 있는 한 대목이네요.

 

 

문 위에 있는 나무 창살 무늬나 다다미며 도코노마, 쯔케쇼인, 명장지는 물론이고  미닫이 문을 열면 다른 공간이 이어지면서 개방적인 공간이 되는 실내 구성이 참 이국적이고 적산가옥이고 지금은 고민가로 말하는 일본식 가옥의 양식을 잘 볼 수 있다.

 

 

일본 가옥은 2층 이상이면 어디든지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는지 여기 말고도 화장실 및 욕실이 있는 곳 근처에도 2충에 오르 내릴 수 있는 계단이 있어요.

 

근데… 일본식 가옥은 원래 계단이 이렇게 가파른가요? (┬┬﹏┬┬)

 

한국전쟁 때 임시수도로 부산이 되었을 때 대통령 관저였던 지금의 임시수도기념관도 전통적인 일식 가옥은 아니지만, 일제시대에 지어진 근현대건물이라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인 만큼 문화재로 지켜지는 건물인데 거기도 계단이 제법 가팔라서 올라가는 것도 등산하는 것 같고 내려오는 것도 옆에 난간 같은 것이 없다보니 굴러 떨어질까 봐 진짜 초긴장하고 내려왔었는데 거기도 계단이 두군데 있어서 어디로 올라갔다가 내려와도 상관없고 여기와 경사가 비슷하네요.^^;;;  

 

 

2층의 긴 복도는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잔잔한 햇빛에 따스한 정서가 감도는 것 같아요.

이날 날씨가 온화하고 따뜻해서 햇빛이 길게 들어오면서 유난히 긴 복도를 접어 들고 걸어가는데 접하는 느낌이 따뜻함이 감돌았어요.

 

 

2층에는 큰 홀이 있는데 가운데 나무 살이 있어서 미닫이로 문을 달아서 방을 나눠쓸수도 있고 이렇게 넗은 공간으로 사용할 수 도 있어서 유동성있게 공간활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한국 전통 건물도 유동성있게 사용이 가능…했나??

트랜스포머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느낌의 공간은 없던 것 같아요.^^;;

 

 

방 한구석에 도코노마(間, とこのま)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었어요.

반 칸 정도 나무판을 놓거나, 다다미를 바닥보다 한단 높여 설치한 공간을 말한느데 구조적으로 방바닥보다는 올라가 있고 벽 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형태로 되어 있어요.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에 생긴 것으로 보고 있는데 당시 성행한 건축양식인 쇼인즈쿠리(書院造)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도코노마는 각 가정의 부를 상징하는 용도로도 이용되곤 하여 서민들에게는 그닥 허락되지 않는 양식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갑옷과 무기, 붓글씨나 그 족자 등을 걸어두거나, 신주를 모시는 인형, 꽃꽃이 등을 놓는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해요.

 

손님을 접객하는 예의로 집에 손님이 오면 손님은 도코노마를 등지고 앉고 주인은 그 맞은편에 앉는다고 하는데 도코노마가 있는 쪽이 상석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손님을 앉게 하고 주인은 맞은 편에 앉았다고 해요.

만약 손님을 도코노마와 마주앉게 한다면 자신의 부를 자랑하거나 과시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어서 예의에 어긋나는 거라고 하더군요. ^^

 

 

도코노마 옆에는 지그재그 형의 장식선반인 지가이다나(違棚)나 덴부쿠로(天袋), 지부쿠로(地袋), 도다나(戶棚)가 설치되어 서책이나 수집품 등이 장식되었다고 하는데 여기도 그런 실내 인테리어가 보입니다.

1층에도 비슷한 공간이 있었는데 2층에도 그런 공간들이 있었어요.

 

 

일본의 주거나 실내공간은 그 형식이나 나눠서 사용하는 방법이 독특하고 재미있게 되어 있는 듯 해요.

마치 1.5층같이 약간 단차를 낮춘 것 같은 짧은 계단이 복도에 있었어요.

인지못하고 그냥 갔음 휘청했을 것 같아요.

 

 

마지막 전시실은 이 건물이 세워질 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사진이랑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찬찬히 보면 그때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었어요.

부산도 항구도시라서 그런지 발전이 어마무시했던 것 같아요.

 

 

근대적인 면이 있는 일본 건물의 6조 다다미 방에서 보는 바깥 풍경도 좋은 것 같아요.

여기가 예전에는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야트막한 낮은 언덕같은 곳에 혼자 불뚝 올라온 지대에 지어져 있고 2층 건물이었기에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었을 그 당시에는 위용이 대단했을 것 같아요.

더욱이 건물을 세운 사람이 사업가였기에 당시에 고급스럽고 부유하게 보일 만큼 잘 지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시대에 일본에 있는 평균 서민의 집에 있는 방이 한칸에  다다미 3조, 커 봐야 4 조였던 걸 생각한다면 2층 집에 작은 듯한 방이 6조정도면 서민의 집에 비하면 큰 편이죠.^^

  

 

 

일본 전통적인 주거 건축 방식과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던 분위기에 따라 근대적인 분위기가 공유하는 것 같은 일본식 가옥인 것 같아요.

 

 

2층 복도와 계단을 따라 이동해 오면 다른 계단으로 1층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1층 한쪽은 일본식 주거양식에 맞게 화장실과 욕실이 따로 있고 수전은 없지만 세면대로 추정되는 곳이 모여 있었고 끝방으로 도서관으로 되어 있고 셀프 카페의 계산하는 것도 있어서 나중에 목이 말라서 음료를 구입했는데 계산을 잘못 할까 봐 난감해서 해매다가 나와서 찾으니 처음에 맞아주신 분이 도와주셔서 페트병으로 된 녹차음료를 구입할 수 있었어요.

이 방은 윗층의 작은 방 보다는 1, 2조는 작은 것 같아요. 여기는 장판이 깔려 있는데 나중에 고급요릿집 할 때쯤에 한쪽을 온돌로 개조했다고 하는데 여기구나 하고 짐작이 가능했어요.

 

 

그동안 보존과 유지보수 및 관리가 잘 되어진 것이 잘 볼 수 있어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역사관이나 대구에 보존되어 있는 근현대 서양 건축 양식을 알 수 있는 선교사님들 사택을 보면 건물보존의 한계도 있겠지만, 오래된 건물인 관계로 안전상의 문제가 있다보니 2층의 관람을 제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임시수도역사관와 함께 여기는 예전 모습을 복원한다고 해도 평소 사료가 남아 있고 기존에 관리했던 것도 잘 해기에 복원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이 잘 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가능하다면 부산은 물론이고 군산이나 포항에도 남아 있는 적산가옥 및 근현대 건축물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암울한 시대에 만들어지고 남의 손에 만들어졌다고, 시대에 맞지 않아 당장의 이익을 따라 마구잡이로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하며 사적자료, 건축사적 자료로 후대에 남겨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어둔 시대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니까요. 

 

 

초가을의 따쓰한 오후에 햇살 한자락을 머문듯이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다른 나라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부산 수정동 일본식 가옥은 건물과 정원이 잘 보존되어 있는 만큼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이 되어서  2007년 7월 3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3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영화 <범죄와의 전쟁>, 아이유의 <밤편지> 뮤직비디오에 나오기도 하면서 많이 알려지기도 하고 문화유산신탁에  의해 [문화공간 수정]이란 명칭으로 대중에 개방되어 운영되어 왔고, 카페와 문화시설을 겸해 운영되었던 문화공감 수정은 2021년 중반을 기해 카페로서의 운영을 종료하고, 차를 마시는 카페로 운영하기보다는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전시 공간 쪽에 무게를 두고 운영하기로 결정하여 지금 개방하고 있다고 해요.

 

셀프카페가 있어서 음료를 아주 못 마시는 것은 아니니 지정된 곳에서 마시고는 뒷정리 및 청결하게 이용하고는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인 깨달음은 진짜 괜찮은 사진 찍고 싶으면 사진기를 다시 청소하고 그래야지…! ^^;;

본체와 필터를 살펴서 닦고 청소하면 되는데 본체는 에어펌프와 본체에 있는 방친? 그런걸로 털어내면 되는데 렌즈의 필터는 스프레이와 렌즈닦이, 렌즈티슈로 적절히 닦아내야하는데 필터가 uv필터와 다른 필터 하나 더 해놔서 그걸 벗겨서 그 사이도 처리해야함에도 분리안되서 한동안 그 사이는 안닦아냈었는데 거기가 문제인가 봐요. 빛번짐과 뭔가 먼지같은 것이 날라다니는 것 같은 것이 보이는 걸 보면 렌즈나 필터의 문제같아서 렌즈와 필터를 오래간만에 깨끗이 닦아줬네요..^^;;

진짜 좋은 곳에 갔는데 평소 카메라 관리가 안되면 뒤늦게 큰 화면으로 보고 저처럼 아차하는 경우가 있어요.

다음에 다시 장비들 정비하고는 방문하고 싶은 곳에 잘 다녀왔습니다.

 

 

 

 

 

 

 

☆ 개인적인 방문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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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부터 11일까지 1박 2일 부산에 머물 일이 있어서 바다에서 가까운 곳으로 찾았지요.

게스트 하우스는 간단한 조식이 제공되었지만 도미토리가 아니면 개인 방을 하려면 5,6만원선에 방을 제외하고 모든 걸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많았고 10만원대 호텔들도 조식이 제공되기는 하지만 조식비를 3만원 전후의 돈을 내야하거나 그게 싫으면 근처 식당을 찾아야하는데 그걸 하는데 번거롭던 차에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부엌이 있는 레디던스형의 호텔이 해운대에 있었네요.

해운대 역에서 몇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메르씨엘 호텔입니다.

 

출처 - 네이버 에약사이트

 

해운대 역에서 지하가 이어져 있어서 에스컬레이터로 1층에 올라오면  바로 CU편의점 맞은편에 있는 LECAFE에 프론트가 있어서 체크인을 하면 되고 그때 엘리베이터 이용하고 방안 전기가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카드키를 받는데 퇴실할 때 왼쪽 위에 어두운 색의 새집같은 상자에 넣어주면 되요.

지상에서 오게 되면 해운대 역 5번, 7번 출구 쪽으로 와서 cgv와 호텔 Felix by STX 로 갈 수 있는 입구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뒤로 가면 프론트를 겸하는 카페가 보여요.

처음에 짐맡기러 갔을 때 좀 해멨었을 정도로 초행길에 찾기 힘들기는 하더라구요.

그래도 직원분이 친절하시긴 했어요.

 

 

체크인 시간이 3시부터이다보니 점심시간 지나서 방문해서 우선 짐을 맡기고 다른 곳에 다녀온 후에 체크인을 하고 카드키와 웰컴 드링크로 아이스 커피 한잔을 들고 카톡으로 알려준 비번으로 해당방으로 들어갑니다.

스튜디오 더블 시티뷰로 예약했는데 며칠 전에 오션뷰로 바뀌어 있어서 체크인할 때 이야기하니 시티뷰가 꽉 차서 오션뷰로 업그레이드 했다며 더 좋은 방이라고 하더군요.^^

 

카페이자 프론트에 있는 호텔이용안내문은 객실에도 있어서 체크인할 때 확인 못 했다면 객실에 들어갔을 때 보는 것도 괜찮아요.

 

 

비번을 치고 들어가면 작지 않은 객실입니다.

서울에 갔을 때 같은 호스텔을 2번 이용했었는데 처음 이용한 곳은 지금 방의 반 정도 되는 크기에 화장실과 침실이 있던 방이었고, 두번째 방문 때는 이용할 기간에 같은 방을 쭉 이용할 수 없어서 처음 하루, 이틀은 원래 이용하려던 룸을 이용하고 퇴실절차 밟아 짐을 프론트 앞에 맡겨두고 나갔다 와서 다른 방으로 체크인을 해서 이용했는데 처음은 첫 이용 때 썼던 방이랑 비슷한 크기였다면 두번째 방이 좀 각이 져서 그렇지 이 방 보다 조금 작은 방이었지만 첫번째보다 큰 방이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거기에 비하면 당시 그 호스텔을 이용했던 비용으로 그곳보다 나은 곳을 이용하는 것이니 나쁘지는 않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있는 신발장엔 빗자루와 쓰레받기, 안보이지만 소화기가 있습니다.

연박을 해도 필요한 물건을 채워주고 쓰레기는 치워주지만, 청소해주는 하우스 키핑 서비스가 없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부엌도 어지간한 원룸의 부엌보다 크고 깔끔합니다. 

개수구가 작아서 아쉽지만 여기서 오랫동안 살 것도 아니고 잠시 머물다가 갈 것이기에 잠시 머무는 동안 사용하기엔 괜찮은 크기이며 인덕션과 전자렌지, 전기포트가 있었어요. 

그릇 건조대와 수세미, 세제가 있어서 그릇 씻는데 문제 없고 사용한 그릇은 깨끗이 씻어놓으라는 안내문이 있어요.

 

 

찻잔과 와인잔도 잘 구비되어 있네요.

와인잔은 요청시 대여해준다고 되어 있던데 전 이미 구비되어 있었어요.

나중에 저녁먹고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근처 다이소에서 구매한 후 해운대 바다보며 좀 놀다가 들어와서 야식을 먹을 때 사온 레몬 녹차를 와인잔에 담아 마셨는데 언듯 보면 화이트 와인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을 낼 수 있었어요. 

 

 

육류나 생선, 튀김같은 것을 제외하면 취사, 조리는 가능하겠끔 되어 있어요.

간단히 베이컨이나 계란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간단히 굽고 국물요리라도 해먹고 그러기 위해서는 식용유나 조미료들은 사와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런 것이 없어요.^^

 

앞서 다녀왔던 이들의 리뷰를 보니 작은 밥솥이랑 토스트기는 있던 것 같은데 가장 최근이고 한달여 정도 차이 밖에 안되는데 비슷한 방인데도 제가 있는 방에는 밥솥과 토스트기가 없더군요.

하지 않더라도 기대한 밥솥과 토스트기를 주고 기대하지 않은 와인잔을 받았네요.

 

 

상부장이 없어서 있는 물건들 위치 확인하기 위해 하부장을 대신 열어보고 있는데 나와 있는 냉장고가 없어서 냉장고가 없는 숙박시설이 있나? 했더니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구석진 곳 하부장의 문을 여니 작은 미니 냉자고가 나왔어요.

 

방의 유형에 따라 냉장, 냉동이 나뉜 큰 냉장고도 있기도 하고 제방에 있는 냉장고 같은 냉장고도 있던 모양인데 크기는 상관없고 부디 냉장, 냉동구분이 있는 거였으면 했는데 냉장만 되는 냉장고더군요.

덕분에 저녁에 들어오면서 편의점에서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로 레토로트 음식과 즉석밥, 음료를 사면서 아이스크림을 사왔던 것을 냉장고에 넣지도 못 하고 씻기 전에 녹기 시작한 것을 허겁지겁 먹고 씻었어요.

 

 

레지던스형이라 간단한 조리가 가능하다면 사람들이 사와서 데워먹던 조리해 먹던 해먹을텐데 음식물 쓰레기는 어찌 하나 했더니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구분해서 버릴 수 있는 쓰레기통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1박이지만 불가분하게 나오는 쓰레기는 구분해서 버릴 수 있었고, 테이크 아웃 잔을 포함해서 분리수거해야하는 플라스틱들은 죄다 씻어서 건조시켜 아침에 나오기 전에 싱크대 한 곳에 모아두었어요.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현관 옆에 있던 욕실.

치약 칫솔은 정부의 정책상 구비하지 않는다고 안내되어진 대로 없어서 오는 사람들은 그걸 감안하고 준비해오던지 1층에 편의점이 있고 근처 다이소가 있으니 그곳들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오면 되요.

 

그것들을 제외하면 두루두루 잘 갖춰지고 크게 불만이 없는데 당시에는 인지를 못 했는데 후기를 작성하던 중에 지금 샤워부스 유리 밑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어요.

 

저거 씻고 난 뒤 혹은 청소할 때 묻은 물기를 스퀴치같은 걸로 끍어내어 최대한 물기 없이 해야 덜 할텐데 그러지 못 해서 그런듯…!^^;;;

그리고 화장실 이용하고 나오려 할 때 문에서 서걱서걱 빳빳한 종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화장실 문에 시트지가 들려서 왔다갔다하며 스칠 때 들리는 소리가 있었는데 이런 거 정도는 아무리 레디던스형의 가성비 좋은 호텔이라지만 좀 신경써줬으면 좋겠어요.

 

 

헤어드라이기와 여분의 휴지도 비치되어 있고, 양치컵과 작은 세수 비누, 여성을 위한 머리끈과 면봉, 화장솜이 들어가있는 작은 팩, 씻을 때 쓸 수 있는 바디 스펀지와 어메니티가 잘 구비되어 있었어요.

어메니티보고 알던거와 달라서 살짝 당황했던 것이 몇개월 차이 안나는 후기들 중에 어메니티가 작은 용기에 담긴 모습으로 나와있길래 사용하고 남은 것은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실제로는 사진 속 용기들보다 큰 펌핑 용기에 있길래 가져갈 생각을 못 했어요. 이 또한 정부정책 때문이겠죠.^^;;;

 

그래도 수건은 넉넉히 비치되어 있는데 페이스 수건 2장이 걸려 있었고, 나오는 입구 바닥에 물기로 미끄러지지 말라고 한장 깔렸고 식탁 위에도 두 장 비치되어 있어서 흥청망청 부담없이 쓸 수 있었어요. 

 

 

침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도 어지간한 아파트 안방 크기에요.

그 안에 책장과 벽장처럼 되어 있는 옷장이 있고 침실과 1인 쇼파도 같이 있었어요.

침대 매트리스의 컨디션에 대해 불만이 좀 있길래 얼만큼이길래…? 했더니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지치고 힘들어서 의자를 뺄 힘도 없어서 침대 끝에 앉자마자 예상보다 깊이 내려가서 그 후기들이 생각이 날 정도였어요.

 

서울에서 묵었던 호스텔의 침대 매트리스와 비교하면 서울 숙소의 침대처럼 매트리스가 딱딱해서 매트리스가 적당히 눌려 들어가서 몸이 편한 것이 아니라 되려 불편했던 거와 반대라서 그래서 불편할 수 있는데 바닥에 잤다는 후기와 다르게 전 그럴 정도로 불편하지도 않았어요.

 

 

역시 거울이 화장실 빼고는 없어서 불편하다는 말이 있던데 책상 위에 작은 탁상 거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책상에 서랍도 있어서 비지니스 출장으로 와서 이용해도 좋아요.

 

 

후기들을 봤을 때 침대 옆에도 독서등과 함께 콘센트가 있어서 넉넉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제가 묵는 객실에는 책상에만 있어서 폰에 알람이 설정되어 있고 자기 전에 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는 나쁜 수면 습관이 있는 저로선 아쉬움이 있었어요.

USB충천할 수 있는 곳이 있고 충전케이블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전 DSLR, 미러리스 카메라와 보조배터리같이 충전할 것들이 있어서 적절하게 이용한 것 같아요.

 

 

붙박이로 있는 옷장도 장기적인 숙박도 가능할 규모에요.

작은 금고도 있어서 중요한 것들은 보관가능하게 되어 있네요.

1인 쇼파는 왜 있지? 싶긴 한데 코너에 따로 있었어요.

 

 

베란다에 세탁기와 빨래바구니, 빨래 건조대 작은 것도 구성되어 있어요.

세제가 없어서 사와야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다이소와 편의점의 접근성이 엄청 좋고 멀지 않는 곳에 세이브 존과 이마트가 있어서 필요한 것들은 그때그때 사와서 써도 될거에요.^^

 

세탁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어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거니와 서비스가 있어도 유료로 이용해야하는데 그걸 생각하면 그냥 돈주고 이용하는 걸 세제사와서 쓰는 걸로 원없이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그닥 아까운 건 아닌 것 같아요. 

 

 

분명 오션뷰…라는데 바다가 안보이는 건 아니지만 건물들에 가려져서 바다가 잘 안보이긴하지만 풍경이 나쁘지만은 않아요.

 

쿠팡에서 1박 2일 스튜디오 더블 시티뷰로 7,5000원에  예약을 했어요.

방문하기 전 하루 이틀 전에 스튜디오 더블 오션뷰로 나름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확정되었더라구요.

뭐 체크인할 때 예약한 거와 달리 된 것에 대한 확인을 했을 때 해당 객실의 입실이 모두 되어서 오션뷰로 바꿔주셨어요. 예약 취소가능한 기간동안 숙소나 갈 지역을 바꿀 수 있기에 최대한 찾아보고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을 때 숙박관련 어플과 사이트를 살펴보고 있을 때 이와 비슷한 일로 대처가 미온적이어서 불만을 산 후기도 있었는데 전 그렇게 일이 커지게끔 한 대처가 아니었고 더 신경쓸 일이 아니었기에 괜찮았어요.

 

한창 더운 여름이 지났지만 아직 시원한 바람이 필요하고 씻을 땐 따뜻한 물이 필요해서 보일러와 에어컨을 모두 가동을 했고 보일러는 온수 사용할 경우 온수였나? 관련 설정을 하라는 안내문대로 해서 따끈한 온수는 잘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집에서 자주 사용하는 에어컨이 아니여서 그런지 설정온도를 낮췄는데도 그닥 시원한 것을 모르겠고 그저 선풍기 바람을 객실 전반적으로 돌아다니게 틀어놓은 것 같은 정도였는데 에어컨이 침대 머리 위 천장에 있어서 그런지 그나마 부엌이나 티비 있는 쪽은 그닥 와닿지 않았어요.

 

냉장고가 조금 더 크고 냉동칸이 작게라도 있었으면 좋으련…! (┬┬﹏┬┬) 하는 아쉬움이 있었고 욕실의 문 시트지가 보이지 않게 일어서 신경쓰이는 것 샤워부스의 유리외에는 모든 것이 만족했고 여러가지 신경쓰지 않고 쉬었다 오기 좋은 가성비 괜찮은 레지던스형 호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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