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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여자의 방랑기/걸어서 세계 속으로 1

2016. 3. 25~2016. 3. 31.경주나들이 첫째, 둘째날

by Esther♡ 201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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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4.에 작성한 여행기§

 

경주...! 참 자주 갑니다 그려...!^^;;;

 

꽃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진해와 경주를 가려고 했으나 동생의 출산으로 진해를 건너 뛰고 월요일까지 기다리려니 부모님과 계속되는 부닥침에 못 이겨서 첫날은 예정보다 일찍 당겨서 가출같이 오는 바람에 원래 있으려 했던 곳이 아닌 당일 금, 토, 일을 묵을 곳을 찾던 중 2년 전에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에  예약하고 부랴부랴 가서는 오후에 도착한 탓에 바로 짐 풀기 위해 예약한 게스트 하우스에 가서 쉬었습니다. 근데 2년 전과 다르게 많이 아쉬움 점이 있더군요...!^^

 

2년 전과 지금의 친절도는 변한 것이 없고 시설도 뭐 아쉬움이 많은 그걸 알고 갔었지만, 그래도 2년 전엔 항상 주인 분께서 상주하시는 것이 아니라서 아침 저녁으로 주인 아저씨 내외분께서 오셔서 불편한 것이 없었는지 그날 그날 조식 준비해주시고 관광 어드바이스도 해주시고 했는데 이번엔...!ㅜㅜ 그닥...!ㅜㅜ

첫날 안면있는 사장님 내외 분 아들되시는 분이 와서 수건을 서비스로 주시긴 했지만 퇴실하는 그날까지 얼굴을 못 봤네요...! 2년 전에는 그래도 손님이 혼자있다보니 나름 딸 신경쓰듯 신경써주셔서 그래도 생각나고 오고 싶은 맘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닥 앞으로 그리 다녀가고픈 맘이 안들 정도였으니 어느 게스트하우스인지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담에는 원래 묵으려던 게스트하우스에 돈 더 주고 같이 운영하고 있는 저렴이 호텔로 할까봐요.^^

첫날은 어영부영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방문만 신경쓰고는 잠들었더랬어요.


둘째날, 전부터 벼르던 김유신 장군묘에 갔더랬습니다.^^

언제 볼 일을 왔다가 온김에 가려다 믿었던 영리한 전화기의 네비에 속아서 헤매다가 결국 돌아갔던 곳이라서 많이 아쉽게도 하고 이때 묵고 있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던 터라서 기본요금에 택시타고 갔었죠.^^

 

 

 

 

 

 

 

 

 

 

 

 

 

 

 

 

살아 있을 당시 연맹국인 가야국 중 한 연맹국에서 귀화한 왕족으로 진골에 편성되어서 죽었을 땐 둘레돌이 없었다가 나중에 공적이 인정되어서 흥무대왕이란 칭호가 내려지면서 왕이 죽었을 때 무덤 둘레돌을 하듯이 둘레돌이 둘러졌다고 하더라구요.

 

 

 

주변에 개나리도 피었더군요 벗꽃이 보고 싶어 경주에 오려했던 것인데 좀 빨랐나봐요 이때는 벗꽃 보기가 어렵더라구요.

개나리라도 볼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그리고 나가는 길에 왠 전각같은 것이 보여서 갔더니 김유신 장군 신도비더군요.

 

 

죽은 이후에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는데 들어가 볼수는 없는 거라서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한반도 통일에 기초를 닦은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패스~!^^

 

 

 

그래도 김유신 장군묘 주변에 있는 벗꽃나무들이 좀 빨리 피는 것 같아요 이렇게 소담히 옥수수 튀밥 던져놓은 것마냥 소담히 가지 군데군데 펴서 나 있어요~! 봄이 왔어요~!!^^ 하듯이 수줍게 폈더라구요.^^

 

 

 

 

 

내려가면서 맞은편 방향으로 걸어서 다리를 중심으로 약30~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으로 가려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코오롱 마라톤 대회가 있는 줄 몰랐네요.ㅜㅜ

모르고 움직였다가 제가 건너려던 타이밍에 신호제어하시고는 경찰분들이 수신호로 몰린 차들 돌리고 그러시길래 모르고 서 있던 제가 뻥져서 있다보니 중계차와 경찰분이 타신 바이크(?)가 나타나서 진로대로 가더라구요. 그걸 보고 알았네요... 마라톤이 있다는 것을...!^^;;; 

 

 

 

 

 

 

 

 

 

 

 

 

아우 달리기 선수들 그것도 장거리 마라톤선수들 몸에 체지방은 물론 단거리에서 승부를 내야하는 100m 선수들 같은 우락부락한 근육이 없는 슬림한 몸이네요. 부러워...!ㅜㅅㅡ

 

김유신 장군묘에서 한참을 내려오다보니 사고당한 이후로 잊을만하면 괴롭히는 고질적인 발목 통증이 스물스물 올라오는데다가 자동신호체계로 얼른 바뀌길 기다리길 30여분을 서있다가 더 서있다간 전설의 망부석이 되겠다 싶어서 무열왕릉은 다음에 기약하고선 눈치껏 보고 횡단보도랑 황천강 다리 건너 역시 바로 박물관에서 모형으로만 보던 황룡사지로 고고씽합니다~!^^

 

황룡사지와 분황사 가는  길에 택시 안에 삼각대 두고 내려서 다시 찾는 건 비밀~! 이제 비밀은 아닌가?^^;;; 가보고 나니 터만봐도 어마무시하더만요...!^^;;;

 

 

 

 

 

 

 

이건 당간지주인데 황룡사 것이라기보다는 옆에 있던 분황사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해요.

 

 

 

황량한 절터에 한가롭게 까치도 날아다닙니다.

 

 

 

 

우물만봐도...!^^

 

 

황룡사지에 가보고 싶어서 갈 곳을 선정하고 동선을 짜기 위해 검색할 때 지나가 듯 본 어느 기사인가 글에 이 곳에 현대판 건물이 서있는 것에 불만인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것으로 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할 거라고 했다는데 그럼 뭐하나요...!

예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유규가 상했던 만큼 조심해야할텐데 글쓰고 있는 지금 기준으로 전날에 '

황룡사 역사문화관’ 경계석축 공사를 급하게 진행하면서 통일신라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을 훼손한 사실이 뉴스로 뜨고 난리도 아니라는... !-_-;;


있는 거라도 잘 관리할 것이지 그나마 보기 괜찮게 정리되어 있는데 거기다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뭐 해보려다가 뭐하는 짓인지...!!

몽고의 침입으로 유지못하고 황룡사 건물과 함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웠던 9층 목탑까지 홀라당 태워 먹은 것도 억울한데 제대로 관리하려다가 오히려 더 상해 먹기만... !

그러고도 "대통령님께서 문화 유적에 관심이 많으셔서...!" 는 뭐지?-_-^

 

 

 

 

 

여기가 목탑지~!

터와 그 위에 놓인 주춧돌들만 봐도 그 크기가 어마무시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죠~!^^

예로 들 수 있는 게 아마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원에 있는 9층목탑 형상물이나 신라밀레니엄파크 건너편에 따라쟁이로 만들어놓은 건물을 본다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황량한 들에도 꽃은 피누나...!

 

 

 

 

 

들어가는 길을 가운데로 두고 한쪽은 유적지, 한쪽은 밭...! 기분이 묘하네요...!^^;;


황룡사지를 다 돌아보고 나오는데 옆에 또 다른 절이 있는데 알고보니 옆에 분황사도 있더군요.^^(앗싸~! 일타 쌍피~~!!^^) 

선덕여왕 때 창건되어 지금까지 잘 유지 되어 온 유서깊은 곳인데 지금은 많이 작아져서 모전석탑과 석정(石井), 보광전과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상이 남아있지만, 예전엔 황룡사, 불국사 못지 않은 큰 절이었다고 하네요.^^

 

 

 

원래 이쪽 출입문으로 출입했다고 하는데 당시 공사 중이라서 순간 뻥~! 0.0;;;

 

 

옆에 분황사에 대한 설명과 구성도?? 그것이 있어 찬찬히 보고선  화살표를 따라 찬찬히 돌아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어요^^

 

 

 

돌탑을 쌓는 이들도 있네요. 저도 하고 실었지만... 돌이 없네요.^^;;

그렇다고 남이 소원빌며 쌓았던 거 빼서 하는 건 아니잖아요.^^

 

 

 

 

보이는 건 모전 석탑. 벽돌로 쌓은 탑인 전탑을 모방하여 갂던지 갈아서 만든 벽돌 모양의 돌로 쌓은 석탑이라서 모전석탑이라고 한다죠.

예전에 학교에서 한국사를 공부할 때 교과서에 어느 지역 모전 석탑인지는 기억안나지만  한쪽이 무너진 모전 석탑을 일제가 더이상 무어지지않도록 하려고 어찌 해보려해도 감당이 안되다보니 그 때 당시 신소재인 시멘트를 더이상 무너지지 말라고 무너진 곳에다 발라놓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식한 짓을 해 놓은 것을 책 속의 사진으로만 봤었는데 지금 그 탑이 어느 곳에 탑인지 모먕만 기억나고 다른 건 기억이 안나네요...!ㅜㅜ

이 탑을 보자마자 그때 책에서 봤던 탑의 모습이 기억나서 잠시 맘이 애잔해서 무너졌네요.

(△ 분황사의 모전전탑을 보고 학생 및 수험생 시절에 책에서 보고 일제가 시멘트로 발라버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탑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네요. 최근 20여년만에 보수가 완료되었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얼굴이 많이 뭉그러졌지만, 네 귀퉁이에 이렇게 앉은 돌사자상이 있는데 각각 암수 사자로 암사자는 동해 쪽으로 숫사자는 내륙 쪽으로 향하게 두었다고 하네요.

그 당시에는 워낙 외적들의 침입도 잦고 그러니 잘 볼 수 없어 낯설고 무섭게 느껴지는 사자를 조각하여 표호하는 소리에 놀래서 도망가라고 동해 쪽을 향하고 왕과 귀족들에게 정신 똑디 차리고 국사에 차질이 없이 어진 정치 잘하라고 내륙을 향해 둔건 아닌지...! 개인적인 추축입니다만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지금 정치인들 듣고 있나??ㅡㅅㅡ^)

 

 

 

추측기론 7층이나 9층이었을거라고 하나 중간중간 치열한 전쟁도 있었고 치졸한 왜구의 심술에 무너지기도 해서 그나마 3층인 현재의 모습이 남은 거라고 하네요.

이 분황사 모전 석탑은 1층 네 곳에 문을 내고 감실을 만들었고 양옆에 반라의 인왕상을 만들어 놓았다네요. 전 첨에 사천왕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서 있어서 다른 그림 찾기처럼 다른 점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어요.

 

 

 

 

한쪽엔 무너지거나 소실된 탑이나 건축물 석재들을 모아놨더라구요.^^

 

 

 

조선 숙종 때 원효와 의상이 변변한 기릴 무언가가 없는 것을 애석히 여겨 새웠다는 분황사 화쟁국사비도 비석을 바치고 있던 비부만 남아 있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망한 마음에 지나쳐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룡변어정이란 석정이 나오네요.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과 하서국 사람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와서 각각 우물에 다시 넣어서 살게 했다고 해요.

그 뒤로 이 우물은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기억하기론 머리털나고 말로만 듣던 곳에 처음 왔지만, 예전만해도 여기서 관광객들이 물도 길러 마시고 했다는데 지금은 안전상의 이유로 저렇게 나무 뚜껑으로 덮어두었다고 해요.

 

 

이 그림을 보고 궁금해져서 폭풍검색 했더니 지금은 없어졌지만 기록엔 영엄했다는 천수대비가 있어서  갑자기 눈이 먼 5살 아이의 부모가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부르게 했더니 눈도 뜨게 해줄 정도였다네요.

역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 벽화도 있었다는데 애석하게도 몽고와 왜구의 침입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던 것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얼마 남지 않았네요...!

위 그림이 있는 건물 안에는 아픈 사람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상이 있어요.

 

 

 

 

저 손에 있는 합이 약이든 합이래요. 그래서 아픈 사람을 고쳐주시는 거라고...!^^

석불이나 금동불, 철불들을 보면 같은 미륵불인데도 표정이 각기 큰 차이점은 없어도 조금씩 다름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약사여래불도 뻔질나게 들락거리던 경주박물관에서 봤던 여래상과 표정이 좀 달라보이긴하지만, 그래도 아픈 자의 위로가 되어주는 듯한 표정이에요.^^

부처님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라서 아프신 데가 있는 분은 소원을 비셔도된다는 문화해설사의 말처럼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던 탓인지 '약사여래부처님~, 제 다리 사고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려달라고, 아픈 것도 불편한 것도 없이 고쳐달라고 하면 무리겠지요...? 무린 줄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해봤어요...!'라고 빌며 살짝 매달렸네요...!^^;;

 

 

 

크~, 울 가족들이 보면 "니 닮았다~! 영락없이 니다~!"하며 엄청 놀렸을 정도로 닮은 석상이 저렇게 동전들을 붙이고 앉아 있는 것이 신기해서~!^^

 

 

 

 

 

목적이 꽃이었던 만큼 눈에 띄면 저렇게 새 렌즈 테스트 겸 해서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네요.^^

나와서는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가던 중 우물과 함께 쪽샘의 유래가 있는 안내판이 있었더랬죠.^^

때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그냥을 못 지나치겠더라구요.

 

 

 

 

다른 이들은 뭐라할지 모르겠지만 물이 맑고 깨끗해요. 시원하고 맛도 부드럽고 좋구요.

어지간해서 샘이나 절에 있는 식음용 물이 있는 곳에 가면은 주변에 질척거리고 물이끼 낀 것 땜에 고인 물은 안마시고 내려오는 물을 받아 마시는 편이고 물을 마셔도 물은 물이지 무슨~!​하는 편인데 여긴 질척거리는 것도, 물이 고인 거북이 등에도 변색되거나 물이끼 낀 것도 없이 아쿠아 마린같은 투명한 파란색의 물이 잔득 고여 있는데 무척이나 깨끗해서 바가지만 씻어서 흐르는 물과 고인 물 모두 마셔도 차이가 별로 없을 만큼 맛이 좋더만요.^^

 

 

 

대릉원 근처여서 그런지 고분군은 물론 이렇게 띄염띄염 홀로 서있는 고분군도 있네요.

대릉원 후문 쪽에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이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있어요. 거기엔 일제 강점기에 힘을 잃은 것도 있고 무지함에 형태를 잃어버린 고분도 몇기 있고 그런 고분 중에 우리가 잘 아는 호우명이 나온 호우총도 있더군요.​

 

 

 

 

여기 고분군에서 단일분 중에는 제일 큰 봉황대에요.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으로 단일 분 중에는 최대 규모고 아직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고해요.^^

예전에 살기 위해 애쓸 뿐 무관심하고 무지함에 관리가 안되서 저렇게 나무들이 뿌리 내리고 자라서 독특(?)한 모양이 되었네요.^^;;

근데 전 저 나무들을 모두 뽑아주고 싶은거죠?^^;;;

 

 

 

일제 시대 일본윗사람들이 와서 철도를 놓고 역사와 차고를 짓는 자재들 중에 돌이 많이 필요하니까 고분들을 파헤쳐서 부장품과 자재들을 같이 얻으려 파헤치다보니 저렇게 형태를 잃어버리고 ​고분터로만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저기도 누군가의 사후 쉼터였을텐데...!

 

 

 

여긴 식리총. 5c 후 ~ 6c 전으로 추정되​는 돌무지 덧널무덤.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가 진행될 때 많이 파괴되었다는 군요.

고분 안에 있던 부장품들 중에 거북등 모양의 테두리에 각종 동물 같은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한 금동신발에 금관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환두대도 등 각종 무기가 출토되어서 어느 정도 위엄을 갖춘 남자 왕족으로 추정된다고 해요.

 

여긴 금령총. 식리총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같은 양식의 고분이래요. 금령이라고 붙여진 이윤 부장품 중 특이한 금제 방울이 있어서 붙여졌데요.

금 인물형 명기와 금령총 금관이 발견되고 금관 등 장식품들이 대체로 소형인 점을 미뤄 주인이 어린 왕족으로 추정이 된다고 해요. 부장품 중에 금제 방울이 있고 대체로 장식품들이 작다고 하면 아직 어린 사람이라고 추정이 능히 가능하죠.^^

 

 

길건너 금관총이 보이네요.

5c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미 봉분이 많이 파괴된 상황에서 한국의 암흑기 당시, 집을 수리하면서 집터를 고르던 중에 뒷뜰을 파다 유물이 노출되고, 그 암흑기를 주도했던 나라의 순사가 듣고는 찾아와서 확인하고 보고한 탓(?)에 비전문가들로 인해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않고 마구잡이로 파헤쳤다네요.

그때 금관을 포함한 금귀걸이, 목걸이, 금제 허리띠, 금팔찌, 금반지 등의 금 장식구들과 자루솥(鐎斗), 허리띠와 곡옥(曲玉), 유리잔, 칠기,  무기, 그릇 등의 여러 부장품들도 함께 출토되었다고 하네요. 이정도로 보면 거의 남자라고 추정할 수 있겠네요.^^

 

 

제가 갔을 시기엔 다시 발굴조사하기 위해 울타리 쳐있더라구요.

언제까지였지?​ 하여간 조사하는 기간동안 함부로 들어갔다간 큰일 나요~.^^

작년부터 조사가 시작했다는데 지상식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묘)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구조가 확인되고, 은제 허리띠 장식, 유리구슬, 금실, 달개 장식이 달린 금실 등을 포함한 새로 발견된 유물 중에  '이사지왕도'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부분이발견되어 혹시 금관총 주인이 이사진왕이 아니냐는 말도 있다는데 확실히 결정된 것도 아니고 아직 발굴조사 연구 중이니까 좀 더 지켜봤음 하네요.

​하여간 무지함과 아픈 역사로 인해 지켜져야하는 옛 조상들의 물건들이 다 외부인들 손에 반출되거나 파괴되고 없어져 버렸으니...!ㅜㅜ

 

 

 

 

서봉총. 좀 모양이 애매하긴하지만 쌍봉이라고 하네요. ^^

여기도 일제가 당시 경주역 기관차고를 지으면서 매립할 흙이 부족하니까 고분의 봉분을 파서 흙과 자갈은 공사장에 보내고 유물은 유물대로 파보자는 심보로 파헤치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이때 발굴책임자였던 고이즈미가 목곽을 발견하게 되었고 평소 고고학에 관심많다는 걸 알고 함께 하길 청하는 일본의 청으로 경주 고분 발굴에 참여하게 된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황테자 내외가 금관을 찾기도 했다고 하며 일본이 아부한다고 당시 스웨덴을 부르는 이름인 서전이란 이름을 붙여 서전총이라고 명명하려고 하자 천년 역사의 신라를 모독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정색하며 하는 황태자의 사양에 일본이 머쓱해져서 서전의 서와 봉황의 봉을 타서 서봉총이라고 명명...!!

일본이 애증의 대상이라서 사랑하는 아이가 잘못하면 매를 드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지만, 미워하면 내가 많이 아플 정도로 안타까운 존재이면서도 참 아부 하난 잘하고 자기보다 약하거나 만만한 대상은 미치다 못해 죽을 지경으로 만들다 못 해 실제로 죽이는 쪽으로 비상하게 머리가 잘돌아간다고 할 만큼 많이 원망스럽기도 하네요...!ㅜㅜ 

 

 

쌍상총이에요. 대릉원의 황남대총처럼 쌍봉분이죠.

그래서 같은 봉분은 아니더라도 바로 옆에 덧붙여 추가장을하여 봉분을 쌓아올린 것으로 대체로 부부가 묻힌 거로 추정을 하죠.

쌍상총은 7c 중엽 혹 그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이 되는 굴식돌방무덤이고 이미 봉분 훼손에 조사도 해보기도 전에 도굴이 되어서 많은 것을 알 수 없어도 두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가 발견되고 관이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이 된되요.

주변에 분포한 고분과는 다른 방식이라 고분 변천에 대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더라구요.

 

 

 

마총으로 쌍사총과 같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통일 신라시대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쌍사총처럼 이미 도굴과  훼손이 되어 있던 상태였고, 그나마 발굴된 것 중에 말뼈와 마구편이 발견되어 마총이라고 칭해졌다는 군요.

이후 53년도에 쌍사총과 함께 국립박물관에서 재조사했을 때 석실로 이어니는 널문에 나무를 사용한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는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서도 보이는 거라고 해요. 

무덤 주인이 주변의 대형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 미뤄보아 마립간 시기 왕족의 후예로 짐작한데요.^^

 

 

 

 

한국사를 열심히 했다면 낯익은 유물 하나 알거에요.

호우명이라고 불리는 유물을요.^^

저어~기 보이는 훼손된 고분이 그 유물이 발견된 호우총이라고 해요. 역시...! 20대 공시생으로 공부에 지쳤을 시기에 들었던 교수님 말씀처럼...! 본연의 모습을 잃고 저렇게 봉분이 무너지고 훼손이 되었네요...!^^;;

또 다시 맘이 무거워서 오래있지 못 하고 결국 ​망연하게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네요...!

 

 

 

이름이 없거나 있어도 주인을 모르는 고분들을 지나 고개를 들어 눈에 들어온 노란 꽃이 그래도 무거운 마음에 발목통증이 더해져 힘들던 제가 그나마 웃을 수 있게 해주네요.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근처에 카페와 무슨 기념관같은 게 있는 한옥모양의 건물이 이뻐서 잠시 담았어요. 당시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비를 맞다보니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리웠지만, 그냥 저녁식사거리를 사서 들어가는 것이 낫다 싶어 오래있지 못 하고 금방 갔네요.

 

이렇게 둘째날까지 마무리 되었네요. 이날 오전에 김유신 장군 묘에서 걸어내려오고 다리까지 건너다 보니 불안불안 했는 걸 컨디션이 어떤지 안살피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대릉원 후문까지 점심먹으로 택도 없이 걸어갔다가 살짝 붓고 통증이 있는 걸 다음날 일정 설렁설렁 해도 소화해내기까지 했으니 왕창 부어서 절 괴롭힐 거라 생각 못 했네요^^;;...!.

셋째날부터는 다음에~!^^ 너무 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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