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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9.에 작성한

 

 

벌써 한달도 전인 11월 26일날 아침, 

전날 뮤지컬 배우 생일파티가 있는지라 모임있다는 미명하에 일찍 올라와 두근 반 세근 반 즐겁게 지내고 술 한방울도 못 하는 위인인데 첨 화이트 와인 한잔 했다가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레드 와인까지 두어잔 마시고 알딸딸해서 텐션-업되서 진정하기 위한 끈을 잡고 즐겁게 있다가 숙소인 호스텔로 안전하게 돌아왔는데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호스텔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조식을 먹고 대학 신입생 때부터 벼르던 양화진으로 향했더랬습니다.

지하철 양화진 역에서 골목으로 얼마가지 않아서 힘들게 찾지 않았어요^^

 

 

 

양화진 입구입니다.

예약을 하지 않아도 시간에 맞춰서 가면 쉼터 쪽인가 해설안내해주실 자원봉사자 분들이 계셔서 요청하면 해주신다고 하네요 저는 시간에 맞추긴했는데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야한다는 조건을 보고 하지 않았던 탓에 미안한 맘이 들어 한바퀴 정중하고 경건한 맘으로 예를 다해 방문했어요.

이 땅에 선교사로 발을 딛이셨던 분들 중 헤른이란 분이 돌아가시면서 장지가 필요하여 당시 조선 관계자들과 실랑이 끝에 양화진에 안장하게 되었고 뒤에도 쭉 그렇게 조선(혹 한국)에서 돌아가시거나 묻히길 원하셨던 외국인선교사님이나 가족, 혹은 자녀들이 묻혔어요.(양화진에만 묻히신 것이 아닌 대구나 전주, 등등 당시 사역하시다가 돌아가신 지역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묻히신 선교사님들도 계세요.^^)

이후 해방되고 6.25사변을 겪고 방치되어 있던 중에 미군이나 외국 상인/사업가가가 묻히거나 한국인 중에 돈을 주고 ​땅을 사서 묻히기도 해서 지금 관리하시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에서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다듬어지고 정비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죠

 

 

아가들이 쉬는 구역. 선교사님의 자녀분들도 있겠지만, 당시엔 한국의 의료기술도 별루였고 풍토병이나 전염병 예방이 못 하던 상황에서 선교사님이든 아니든 아이들이 제일 치명타가 될 수 밖에 없었을 테죠...^^

 

 

언더우드 가(家)에요. 1대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부활절날 아펜젤러 선교사님과 함께 한국 땅 밟으시고 의사이자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 전문학교를 세우셔서 의료와 교육, 성경번역 등 힘쓰시고 일제에 의해 반일인사로 여겨질만큼 한국민중과 연대하는 선교사로 친일 성향의 선교사들과 일제에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셨던 굵은 흔적을 남기고 대를 이어 한국을 위해 힘쓴 선교의 가문이네요.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던 호머 헐버트선교사님.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교육자로, 훗날 감리교 선교사이자 감독이자 역시 교육자로 조선에 발을 딛이셨죠.

어지러운 시기에 일본의 만행을 보았고 고종의 정치적, 외교적, 문화적 자문을 하는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으며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어요.

해방 되기 전 일제에 추방 당하기 전까지 조선을 위해 일하고 일제에 항거하며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며 암울한 조선을 조선 사람들 보다 더 아파하고 아끼며 사랑하신 분,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다시 한국에 들어와 힘써 일하셨던 분이십니다.

자신의 고향 땅에 묻히기 보다는 눈감는 순간에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하신 유언대로 2살 때 죽은 자신의 아들이 묻힌 양화진에 묻히셨던 헐버트 선교사님은 한국사 교과서나 역사 책 외에도 한국에서 활동하셨던 선교사님들의 자서전에도 종종 등장하셔서 많이 익숙한 분이세요...!^^

 

 

아펜젤러 선교사님. 가족도 같이 묻혀 계셨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_-;;

 

선교 관련 수업이나 오리엔테이션 훈련에 듣기론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언더우드와 함께 외교관이나 사업가가 아닌 선교사로서 첫 발을 딛으신 분이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배재학당을 세우시기도 하고 마지막 배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자신은 능히 사실 수 있는데 물에 빠진 조선아이를 살리려다가 돌아가셔서 시신조차 못 찾으셨다네요...! 너무나 슬프고 감사하기도 하고...!ㅜㅜ

 

 

 

셔우드 홀 선교사님이라면 [조선회상]​과 결핵, 크리스마스 씰이 먼저 생각이 나네요.^^

이 분도 부모, 형제, 자녀를 묻어가며 이 곳을 위해 일하고 어거지로 만든 꼬투리란 꼬투린 다 잡혀서 추방되어 인도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이 땅에 결핵을 퇴치하기 위해 애쓰신 의료선교사이십니다.

어머니인 로제타 셔우드 홀 박사가 봐도 아들은 자신들 부부처럼 의사로서의 재능은 없어보이고 되려 일찍 떠났지만 어린 유복딸 에디스 마그리트가 의사로서의 자질이 보였다고 해요. 

미국에서 사업가로 살려던 셔우드 홀 선교사님은 원산에 있는 R.A.하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감화되었고 누이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죽는 것을 계기로 의사가 되어 결핵퇴치와 계몽에 힘쓰고 무지한 조선인들의 미신들과 싸우면서 치열하게 사셨어요.

1대인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님과 로제타 홀 선교님도 의료와 맹인 및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시고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님은 전염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유복녀인 마가렛도 두어살도 안되어 남편 옆에 묻은 로제타 홀 선교사님도 천수를 누리고는 남편과 딸이 있는 양화진에 묻히시고 아들인 셔우드 홀 선교사님 내외 분도 쌍둥이로 얻었으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들과 함께 부모님 옆에 함께 묻히셨네요. 결핵 퇴치 및 계몽을 위해 고안해 냈던 크리스마스 씰도 셔우드 홀 선교사님께서 만드셨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한국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찌와 부인 우에노 다끼.

술취해 길에서 죽을 뻔한 소다를 조선인 청년이 구해준 것이 고마워 1905년에 와서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으로 취직하셨어요. 이무렵에 수감 중 예수를 믿게 되었다가 풀려 나온 이상재 선생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고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도 합니다

 

소다는 105인 사건(1911년)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공격하면서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힘쓰셨어요. 이 때 한국인들로부터 감사와 찬사도 들었지만, 간사한 일제의 간첩이라는 비방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고아들을 위해 일하면서 버려진 아기를 업고 유모를 구하다가 면박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이 돌보던 고아 청년이 항일 운동하다 비방당하기도 하는 등 한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모욕을 당해가면서도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인과 한국을 위해 일을 했었고  패망 후엔 소다 가이찌는 일본에 들어가 조국 일본의 회개를 촉구하였고 우에노는 한국에서 고아사업을 계속하던 중 먼저 세상을 떠났고 소다 가이찌는 1961년 초청받아 한국에 들어오셔서는 고아원에 함께 생활하다 돌아가셔서 아내 옆에 묻히셨네요.

일제시대 일본인이라고 조선인을 괴롭히고 압제하며 못 살게 굴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잘못을 반성하도록 촉구하고 약한 사람, 도움이 필요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돕고 항거하며 의를 위해 살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아요...!^^;;;

 

 

 

 

때마침 로제타 셔우드선교사님 및 셔우드 홀선교사님과 관련​된 전시도 했었는데 1월달까지라고 하던 것 같은데 방문하기 전에 들릴 거라면 미리 문의해보세요.

(※ 양화진외국인선교묘원 문의 전화 02)332-9174,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www.yanghwajin.net/)

 

나오는 길에 서울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기회가 된다면 해설시간에 맞춰 올 수 있음 언제든 다시 오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번 방문이 첨이자 마지막일거라고는 생각 못 하구요.

근처에서 점심 먹고는 그 길로 경복궁으로 향합니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나오면 바로 코 앞입니다. 뭐 좀 걸으실 각오가 되셨다면 5호선 광화문역​을 이용하셔도 되요^^

 

 

이렇게 안쪽만 보는 것은 아쉬워서 표 끊기 전에 잠시 밖으로 나가봤습니다.^^;;

 

 

광화문 밖으로 나왔을 때 이렇게 ​수문장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사진찍는 사람들이 많네요. 결국 외국인들이 다 인데 저도 찍고 싶었는데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할지...!!^^

​결국 검은 머리이신 여자 분들에게 "혹시 한국 분이세요~? (수문장을 가리키며)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라고 요청했을 때 알아들은 것처럼 시원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시길래 저도 찰칵~! 했는데...!

 

 

뭔가 이상해서 "Where are you from...?^^;;"하고 물으니 "Singapore~!^^"이란 말에 제 웃는 얼굴이 그 웃는 표정 그대로 급속 냉각이 되어 식은 땀만 주르륵이 되더군요. 제가 사진 부탁할 때 몸짓으로 자신들도 찍어달라길래 흔쾌히 찍었더랬습니다.

영어를 어느 정도 의사전달이 될 정도의 조합과 몸짓으로 세 번찍고 찍기 전에 하나 둘 셋~! 할거라고 전하고는 찍으려는데 제가 제 사진 부탁할 때 들고 있는 제 카메라와 실력의 갭이 큰지 옆에 중년의 백인 아저씨께서 오셔서 손 끝으로 잘 찍을 수 있도록 가르켜주셔서 요행이 사진 찍어주고는 도망치듯 성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네요.^^

 

 

 

용케 티켓을 사고 들어가는데 월요일 낮인데도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오전에 양화진은 워낙 경건한 분위기에 예의를 갖춰야하는 조심스런 장소여서 그런지 몰라도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여기는...! 사람에 치일 것처럼 많더군요...!^^;;

하지만 경복궁 옆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중국을 포함한 중화국가에서 온​ 듯한 관람객들의 비매너 행동과 홍수처럼 밀려드는 인원수에 치일 것을 몰랐기에 식겁을 했겠죠....!!^^;;;

 

 

 

여기는 정 몇 품일까요? 흐릿해서 잘 안보이네요.^^

 

 

 

드라마를 보면 궁중에 행사가 있을시 좌우에 정, 종품의 대신들이 예복을 입고 예를 갖춰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 저 비석들이 해당 품계의 자리를 알려주는 알림판 같은 거죠 ​~.^^

 

근정전. 한번씩 다큐멘터리나 사극에서나 보아오던 근정전의 내부는 어떤지 무척 궁금했었는데 무척 설레네요^^

 

 

뒤의 병풍에는 해와 달, 소나무를 그린 거란 것쯤은 다들 아시겠지요...?^^

다만 난방이 되겠금 해놓은 구조는 아닌지라 많이 겨울엔 많이 추었을 것 같에요.^^ 그래도 함부로 못 쳐다볼 높이로 만들기는 한 것 같아요.^^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전 사학과 쪽으로 공부했다면 전 땅파러 다니는 것도 하겠지만, 건축이나 조각, 의복 및 장식구, 기타 사회/문화적인 것들을 많이 파고 들었을 것이고 세계로 돌아갈 여건이 되면 여러 성들이나 옛날 건물들이 잘 보존이 된 곳들을 많이 찾아 다녔을 것 같아요...!^^

건축양식이나 의복 등을 ​보면 각 나라별, 시대별로 특징이 잘 들어나서 좋아보이더군요. 그래서 좋아요.^^

 

다음은 보아하니 동궁을 먼저 들린 모양이네요^^

 

 

 

 

동궁을 보면 양쪽 방을 어떻게 쓰였을지 짐작할 수 있도록 잘 꾸며 두었더군요.

그래서 한국사를 다른 다큐를 보거나 공부할 때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니다보니 장님 코끼리 만지듯 보고 듣기만해서 어려웠던 구조는 이제 까막눈인 것은 어느 정도 벗은 듯해요.

동궁 담장을 넘으면 동궁 일원이 나와요.

10월 말이라서 그런지 은행잎이 이쁘게 물들었고 여기저기 단풍이 살짝 들었더군요.^^

 

 

 

 

동궁을 보면 양쪽 방을 어떻게 쓰였을지 짐작할 수 있도록 잘 꾸며 두었더군요. 그래서 한국사를 다른 다큐를 보거나 공부할 때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니다보니 장님 코끼리 만지듯 보고 듣기만해서 어려웠던 구조는 이제 까막눈인 것은 어느 정도 벗은 듯해요.

동궁 담장을 넘으면 동궁 일원이 나와요.

10월 말이라서 그런지 은행잎이 이쁘게 물들었고 여기저기 단풍이 살짝 들었더군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표정이 많이 편안해 보이네요.^^

 

 

 

우리나라 궁 중에 무척 크기도 하고 알려진 곳이다 보니 중간중간 와서 사진찍는 외국인​들도 눈에 많이 띄네요.^^

 

 

궁 옆에 박물관이 있는 것도 이색적인데 박물관 같은 곳은 어지간하면 꼭 가보잔 주의라서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민폐 중화권 외국인 관람객들에 힘들어 할 거란 걸 전혀 예상 못 했으니까요...!^^;;;

 

 

 

들어가는 길에 12지신상이 있네요.^&^

민속박물관이란 이름답게 우리나라 민속 문화에 관련된 것들​이 잘 전시되어 있어요

각 시대별 생활 양식이나 사회문화를 얼추 짐작 할 수 있으니까요...^^

 

 

 

 

 

 

전 또래들 보다 부모님의 연세가 많으시다보니 옛날 이야기하시면 언제적 일인가...?싶을 정도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야기였었는데 한번씩 어른들이 옛이야기하실 때 듣던 남포등을 보니까 진짜 반갑더라구요.^^

 

 

 

 

 

 

 

 

 

 

 

TV에서 종갓집 종부되시는 요리 연구가 분이 김치 담그실 때 사용하시는 것을 봤는데 이 학독을 어떻게 쓰는지 아는 사람은 많이 없다는...!^^;;

 

 

옛날 돌잡이​에 쓰이던 건데 요즘도 요거로 했으면 좋겠다는...! 괜히 이것저것 욕심대로 올리는 것 같으이...!ㅜㅜ

 

 

 

 

"함사세요~!!​"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옛 의학 도구들이죠. 한의학이 다소 신비로운 면도 있고 나름 ​검증하기 어려운 만큼 비과학적이라고 욕할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서양의학에 천대받고 무시받을 만큼 덜떠러지고 미신적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아요.

당시에는 약으로 쓰였던 약재들 중엔 과학적인 검증으로 더이상 약으로 쓰이지 않고 한방에서 쓰는 약재들이 배제되어 전혀 쓰이지 않고 자연에서 나온 천연인데다 양방의학에서 쓰인 약 중에도 그런 한방적인 천연재료를 첨가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렇게 서로 상생하고 협력하면 더한 시너지를 내어 현대 의학 특히 한국에서는 더한 의학/의료발전하는데 그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저인데 양방의학에서는 왜 그렇게 한방의학, 한의학을 싸고 부수려드는지 모르겠어요...!^^

 

 

 

 

 

환갑연이었나? 어른 회갑같은 생신상을 재연해둔 거네요.^^

저희 부모님은 못 해드려서 죄송하고 그랬는데 다시금 보니까 삼남매가 자체 늦둥이였던 터라 제대로 해드리지 못 했던 것에 죄송함이...!^^;;

 

아우~, 근데...! 국립 민속 박물관에서 만난 중화국가에서 온 듯한 외국인 관광객들 여기쯤 관람하면서 누적되었던 것들로 인해 진짜 그 사람들 싹~ 쓸어다 엮어서 한강에 빠트리고 왔음 좋겠다 싶을 만큼 비매너들이더군요.

너무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좀 심한 말이 있지만, 옛날 옛적 우리 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갔을 때나 한국에 외국인들이 놀러를 오던지 하면 시끄럽다느니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느니, 기본 질서를 지키지 않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듣던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어도 부족할 만큼 어찌나 무질서하고 시끄럽고 비매너인지...!

나중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께 중국에서 온 듯한 외국인 관광객들 왜 그렇게 시끄럽고 안하무인에 무질서하냐고 있는대로 욕했던 것 같네요...!^^;; 특정나라를 지정하여 편견을 갖고 욕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그들의 못 난 모습이 외국에 나갔을 때도 같은 모습이라면 그 나라 그 민족의 사람들을 욕하게 되고 눈총받게 되는 걸 그들도 알고 있을까요? 일행이 아닌 다른 관광객들의 짜증섞인 눈치와 박물관에 배치된 직원들의 그렇게 하지 말라는 제스처로 눈치줘도 잠시 뿐이고...!ㅡ.ㅡ^

상당히 불편하고 불쾌하고 짜증이 좀 돋았네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그만큼 국민성도 따라 발전한 것은 아니라서요.

혹여 다시 외국으로 나갈 일이 있다면 최대한 다른 나라, 다른 문화 속에 있던 사람들이 인상찌푸릴 정도로 민폐끼치는 일은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그들을 통해 하게 되네요.

 

 

 

 

 

제가 갔던 날 장고 개방이 있던 시기더라구요.^^

장고가 장을 담근 독들 보관한 창고라고 하더라구요.^^

누가 궁궐 속 장고가 아니랄까 봐 진짜 넓더라구요.^^

 

 

 

 

예전같지 않은 다리에 급격히 불어났던 체중으로 다리가 힘든 감이 없지 않았는데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카메라에 다 담지 못 했어도 돌아 보는 중 향원정까지 오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왜...! 하필이면...!! 숙소에서 가지고 가야지 하고 챙겨 놓고도 깜박 잊고 우산을 안들고 온 내 탓이오...!!ㅜㅜ

계속 비맞으면서 돌아다닐 건지 아님 그냥 돌아갈 것인지 결정해야하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운데 다시 올 수 도 없어서 그냥 비 맞기로 했네요. 여기서 우산 살 곳도 없었던 탓도 있구요^^;; (다행히 호스텔에 문의하니 옷을 빨고 건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대신 비맞은 여파는 톡톡히 치뤘네요.ㅜㅜ 으슬으슬 에이취~!!)

 

 

 

 

 

비내리는 향원정. 비가 와서 더 운치 있어 보이네요...^^

 

 

 

 

 

 

 

 

 

 

 

 

 

 

 

 

 

경희루 역시 편안한 분위에 비로 인해서 더 운치가 있는 것 같아요.

이날은 경복궁에 들리고 나서 저녁 시간 괜찮다면 삼청동거리와 북촌 한옥 마을도 함깨 가보고 로스팅 카페도 가보고 싶었는데 비 땜에 우산이 없어서 경복궁도 제대로 보지도 못 하고 후다닥 나와서 젖은 상태로 우산을 사도 감기 걸릴 가능성이 크고 다리가 후덜거려서 힘들 것 같아 결국 지하철 타고 숙소로 들어왔네요.^^

오는 길에 저녁식사를 사서는 빨래 돌리는 시간에 맛나게 먹었네요.

이날은 다리 다친 곳이 뻐근했지만 그래도 안 아까운 날이었어요. 뭐 비온 것과 삼청동 및 한옥 마을을 못 가본 것이 아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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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에 작성한 포스팅입니다.

 

 

지난 4월달에 볼일이 있어 경주갔다가 1년 전에 경주 여행왔다가 못 가봤던 김유신 장군 묘와 태종무열왕릉을 가보려다 김유신 장군 찾으러갔다 가는 길을 헤매다 결국 못 가보고 다시 행차한 곳이 경주 박물관이넹...^^;;

참 징~하다^^;


 

예전 학교에서 선생님들께선 학생들이 지겨워할 때 쯤이면 옛 선조들의 기술과 솜씨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때 들은 기억이 있어요.

 

옛 선조들이 범종을 매달 때 쓰이는 고리같은 걸 만들 때 어떻게 만드셨는지 아무리 과학적으로 밝히고 현대 기술로 만들려도 해도 얼마 버티지 못 하고 탈이 낫다고. ^^;

 

역사적인 사찰 같은 곳에 가면 으례 저런 범종이 달려있는 경우가 있을텐데 가서 보면 밑에 움푹 패이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임.^^

그건 평평한 바닥일 때보다는 움푹 들어가 있을 때 그 울리는 소리가 다르다고 소리가 더 깊고 무게가 실리고 더 멀리 간다고 배웠던 기억이 있네.^^

 

 

 

 

 

 

도깨비 모양의 장식이 있는 것은 그만큼 악귀나 해코지하고 질병을 몰고​ 오는 더러운 귀신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서 해를 끼치지 말아달라는 약한 인간의 바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지.^^

 

 

 

이렇게 ​당시 생활양식을 알 수 있는 것들이 좋아요.

아마 사학과나 역사관련 학과를 전공했으면 무덤이나 유물발굴하기 위해 땅파러 다니기 전에 의복이나 건축, 가구, 장식구, 의복, 조각상 등에 관심이 많아서 당시 생활상이나 문학을 주로 연구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날 수학여행온 듯한 아이들이 많더군요... 전 어딜가든 애증의 존재인 아이들 속에 함께 있는 듯 해요...^^;;

 

 

 

 

 

 

 

해학적이면서도 귀엽네요.​^^

 

 

 

경주는 1천년동안 한나라의 수도였고, 사찰이 많이 모여 있을 만큼 불교의 색채가 강하고 불교 유물과 감은사지나 황룡사지같은 유적이 많다 보니 국립 경주 박물관에는 신라미술관이 따로 되어 있어요.

굳이 제게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기독교라고 하지만 ​유서깊은 사찰이나 유물적 가치가 있는 불상이나 탱화같은 불교조각, 그림같은 것에 역사적인 가치로 관심이 많아요.

그 시대의 예술적 감각이나 색채, 건축양식이나 미적 감각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종교를 떠나 유적, 유물, 역사적의 의미로서 받아들이고 친근해지려고 해요^^;;;

 

 

 

장식구들이네요. 저도 여자라고 이런데 관심이 많네요.^^

 

 

 

 

 

 

 

 

 

동궁과 월지관을 둘러 보고 나오는 길 모형처럼 꾸며놓은 곳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으로 은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네요

 

 

불국사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 실물크기의 모조품이네요. 사실 작년에 불국사에 갔을 때 석가탑인가? 해체 보수작업 중이라 못 보고 온 것이 많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모조품이지만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죠...!^^

 

 

 

 

진짜 이날 여기저기 애들이네요.

어지간히도 말을 안들었음 중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에게 말 좀 들으라고 복장터진다는 듯이 타이르는 남자선생님을 보고 오죽하면 저러실까 싶기도 하고...!^^;;;

애들아~, 선생님들 중에 진짜 존경심​이 안드는 선생님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너희를 가르치고 애쓰시는 분들이시니 말 좀 잘 들어라~!^^;;

 

 

 

 

박물관에 갈 때마다 옛 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무기나 도구들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네요.

​더욱이 석기 시대는 언어나 문자로 남겨진 흔적이 그닥 없어서 석기를 보고 추측이 가능하다보니 그만큼 신기하게 보게 되네요.

 

 

 

 

 

 

 

권세를 갖고 힘을 갖게 되는 것은 누가 더 강한 금속을 가지고 다룰 수 있는지 얼마나 강한 철을 만들고 다를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철을 다를 수 있을 정도면 왠만한 금속은 다 다를 수 있었을테니 그만큼 세공법도 발달되었을 거라 생각하는 저입니다.

 

 

 

 

 

 

 

 

 

 

 

 

 

 

 

아픈 자들을 치유한다는 약사여래상이네요.^^

손에 들고 있는 합이 약그룻,약합이라고 하는데 제가 교통사고로 많이​ 힘들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불상 중에 이 불상에 맘이 많이 가네요.^^

 

 

 

 

 

금강역사들을 보면 우락부락 울퉁불퉁한 몸과 역동적인 동작을 보면 역동성이 엿보이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에 귀엽기까지 하죠...!^^

 

 

 

 

 

 

 

 

 

 

황룡사 역시 그런 아쉬움이 가장 큰 역사적 장소죠.

그래도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에요.^^

 

 

 

하루 반나절 방문기이자 유년기부터 지겨울 만큼 방문했지만 결코 지겹지 않는 박물관에 계속 올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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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29.에 작성한 여행기입니다.

 

 

 

2014년 어느 봄날, 작은 공동체 안에서 이뤄진 무배려와 무관심, 극한의 몰림으로 오는 스트레스로 쌓이고 쌓여서 결국 빵~~~!!!!하고 터져서 세월호로 국가적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침울하고 안좋은 시국인데도 불구하고 바로 짐싸고 경주로 향하고 말았네요...ㅜㅜ

 

 

흔들리는 차에 몸을 싣고 달린 끝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YOU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제일 가까운 계림과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 보물68호)가 있었어요. 고려시대 세워진 것인데 정려비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들이 살던 고을에 기념하여 세워주는 것인데 손시양이란 사람이 양친이 돌아가실 때마다 3년씩 초막을 지어 살며 묘소를 지키고 효성을 다했다하여 세웠다고 하네요.

이만큼 다른 시, 도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경주는 발이 닿는 곳마다, 눈이 가는 곳마다 역사관련 설화나 비석이 많고  유적지고 사적지일 만큼 도시자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드디어​ 대릉원에 도착했습니다.^^

​입장료 2천원을 내고 들어갔습니다.^^

 

길고 긴 산책하기 좋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어릴 때 엄마 손 잡고 조상님들이 묻힌 곳이라고 대릉원 여기 저기를 신기하다며 ​쫓아다녔던 기억이 있네요. 그렇게 자주 와서인지 이후에 학교 수학여행이었나?해서 단체 관람 왔을 때는 별 감흥이 없고 덤덤했다는...!^^;;

 

 

당시 시국이야 어떻든 그래도 오래간만에 집 밖에 나온 것도 신선하지만, 생애 첨 단체나 가족끼리가 아닌 혼자서 여행이란 이름 아래 나왔다고 한참 들떴네요^^;;

 

 

당시 시국이야 어떻든 그래도 오래간만에 집 밖에 나온 것도 신선하지만, 생애 첨 단체나 가족끼리가 아닌 혼자서 여행이란 이름 아래 나왔다고 한참 들떴네요^^;;

 

 

드뎌 대릉원의 첫 방문지인 미추왕릉 이에요.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저렇게 담을 치고 문을 세워 단단히 자물쇠를 채워뒀지만 그래도 신라가 아직 사로국인 시절 박, 석, 김씨 돌아가면서 왕이 될 시기에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가 석씨 성을 가진 탈해 이사금 시절에 세자로 책봉되지만 파사 이사금에게 왕자릴 양보한 뒤 김씨 가문 사람들 중에 처음으로 왕이 된 미추이사금이지요.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 왕들이 얼마나 있었게냐마는 미추왕은 신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는 설화가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죽엽군 설화와 김유신 장군관련된 일이에요.


23년 재임이 끝나고 미추왕을 이어 왕이 된 제14대 유례왕(儒禮王) 때 이서국(伊西國)이 쳐들어 왔는데 당시 사로국이 힘이 부쳐서 밀릴 때 갑자기 돌풍이 불면서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쳤다. 싸움이 끝난 뒤 갑자기 사라져서 그 군사들이 어디서 온 누군인지 몰라서 사람들이 의아해 하던 중 미추왕릉 앞을 보니 댓잎이 잔뜩 쌓여 있었다고 해요. 이를 보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선왕(先王)이 음으로 도왔음을 깨닫고 그뒤로는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해요.

 

이후 통일 신라시대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때는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생전의 모습인 김유신 장군이 나타나서는 준마를 타고 무장을 한 40명의 혼령을 끌고는 죽현릉 쪽으로 가더니, 통곡소리와 함께  살아서도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기 위해 애써 왔는데 그런 자신의 후손이 죄없이 죽었다며 이는 저의 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신라를 떠나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으니 왕께서 허락하시면 떠나겠다고 세번이나 허락하길 청하였으나 미추왕이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하겠소. 공은 다시 그 전처럼 힘써주시오."하며  설득하고 다독이며 끝내 떠나는 걸 불허하자 김유신 장군의 혼령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대요. 이 말을 들은 혜공왕은 덜컥 겁을 먹고 대신 김경신(金敬臣)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 대신 사과하고 취선사(鷲仙寺)에 공덕보전(功德寶田)을 내려 김유신의 명복을 빌게 했지요. 그뒤로는 미추왕을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고 미추왕릉의 서열을 오릉(五陵) 위에 두고 대묘(大墓)라 불렀다고 해요.

 

​뭐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되나 그렇게 나라를 사랑하시는 분이 한분이라도 조상이라고 계신다는 것이 감사하죠.^^

을사오적처럼 나라팔아먹고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당당하고 뻔뻔한 조상도 있고 그들의 후손들도 있는데 부끄럽지 않은 조상 밑에서 부끄럽지 않는 후손이 되고픈...?^^;;

네~, 죄송해요. 너무 나갔네요~!^^;;

 

 

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돌봤고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나이 많은 자들이나 어려운 자들을 먼저 돌보고 살피며 민생 전반을 돌보기도 하고 궁을 다시 짓자는 신하들의 청에도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라며 거절할 정도로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백제든 어디든 쳐들어온 적들을 물리치시며 나라를 돌보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하네요...!^^ 

 

 

 

 

 

대릉원엔 여러 무덤들이 있으면서 돌아볼 수 있도록 길이 잘 되어 있어요.

 

양쪽 무덤을 돌고 돌아서 부부총이라고 부르는 황남총을 지나 천마총 앞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단체로 모여서 해설안내해주시는 분의 안내를 따라 다니는 무리(?)도 있더군요.^^

전 당시 단체로 욺직이는 것에 묘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왔던 터라 개인으로 힐링 차원에서 왔기에 개인전이 좋아서 천마총에 들어갔었죠. 당시 내부 사진은 촬영 금지라 없어용~ㅠㅠ

 

 

 

 

 

근데 계림으로 갈려면 들어갔던 정문으로 바로 나와야지 바로 엎어지면 코닿을 곳일 만큼 가까운데 후문으로 나오는 바람에 삥~~~~!!! 둘러서 갔다는...!!ㅜㅜ

덕분에 많이 힘들었어요...ㅜㅜ

그래도 난생 첨으로 혼자 나돌아다니는 거라고 많이 신났네요.^^;;

 

 

 

계림으로 가야하는 데 후문으로 나오는 바람에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당황해서는 경주라면 눈감고도 다니실 정도로 빠삭하신 아버지께 사정을 말하고 여쭤보니 설명하시는데 저 방향 감각이 마비되서 내비가 망가진 제게  "정문으로 안나왔구나? 정문에서 나오면 있잖아~!^^ 내물왕이라고 니네 조상 무덤 있고 바로 그 옆에 있는데 못 찾았나?"하셨는데 "아부지~ 경주는 널린 게 무덤인데요?" 할 정도로 그 무덤이 이 무덤인지...! ^^;;

아시잖아요~. 경주는 고개만 돌리면 저런 봉분의 무덤이 흔하다는 거~!ㅜㅜ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좋아보이는 첨성대에도 당시 일요일이라서 그런지사람이 많았네요 예전엔 500원이었나? 입장료가 있었던 걸로 기억했는데 이때는 입장료가 폐지가 되어서 무료입장이어서 편안하게 둘러봤네요.

호리병 모양의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첨성대 앞에서 찰칵~! 여라번의 타이머를 맞춰서 그나마 건지 사진이네요ㅜㅜ

첨성대 근처에 경주 이씨 교감공파 관란종친회가 있는 문호사가 있더라구요.^^ 다소 생뚱맞다 싶어서 조금 의아하기도 했어요.^^

 

 

 

 

 

 

 

 

계림과 유채꽃밭을 지나고 나면 석빙고와 월성터로 향하게 되는데요, 사실 볼 게 없어요~.ㅜㅜ

석빙고 하나만 덩그렁이 있고 지나게 되면 월성터가 있는데 안내판이 없었으면 잘 몰랐을 거예요.

그래도 산책하듯 방문하기엔 좋아요.^^

 

어릴 때 여러번 경주에 왔었어도 그 잦은 방문 속에서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 엄마 손 잡고 동생이랑 같이 집 근처 숲이나 공원에 산책하듯 계림도 오고 석빙고도 오고 월성도 오고 했던 기억이 있지만, 어릴 땐 어려서 힘들었다면, 지금은 사고 이후로 급격히 떨어진 체력과 약해진 다리로 인해 역시 힘들었네요.

월성터까지 지나서 나오면 길 건너편에 바로 안압지로 알려진 월지와 동궁터가 나오는데 월지와 동궁터는 야간개장이 되기에 관람시간이 한정되어있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다음날 월요일이라서 관람이 안되다보니 경주 박물관부터 향했습니다.

 

 

 

 

날이 좋아서인지 몰라도 학생들도 있고, 나들이 오셨다가 관람하러 오신 어른들도 계시고 이렇게 귀여운 아기도 엄마와 함께 왔더군요^^

 

 

 

 

 

 

 

어릴 때 경주에 오면 거의 안빠지고 왔던 곳이 이 경주 박물관이었던 것 같아요. 중, 고등학생 때에 단체견학으로도 왔던 기억이 있을 정도로 집같이 익숙한 곳이지만 올 때마다 새롭고 신기하고 즐거운 곳이에요.

 

이날은 경주에 오자마자 안 쉬고 바로 무리해서 돌아다녀서인지 몸이 힘들고 발목에 남아 있던 고정물과 연골에 있던 염증을 제거하는 수술하고 퇴원한지 몇주안되었을 때라 무리했는지 부서질 듯 통증이 몰려와서 무사히 관람하는 것이 우선인지라 사진을 별로 남기지 못 했네요.^^

 

저는 저희 오빠나 여동생과 달리 정치적인 것이나 외교적인 것에 관심의 비중이 크지도 않고, 위인들을 파고 들거나 땅 파고 무덤뒤지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의.식.주와  장식구, 그릇 및 도자기, 사회/문화, 시나 소설 같은 문학 등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을 많이 뒤지기는 하지만 때론 기초적인 수준에서 제 이름 석자를 쓸 수 있을 정도의 한자로 인해 서신/문학 부분에서 꽉!! 막혀서 한계가 있어서 많이 답답하고 미리 한자공부를 좀 잘 해둘 것을...!하는 아쉬움이 같이 있네요.

특히나 냉수리신라비같은 비석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서책과 서신 등에 있는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것에 제 때 공부하지 않았던 제게 화가 좀 날 정도로...!^^;;

그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로 안압지로 향했습니다.

오후 5시 반 정도 저녁이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밝아요.

입장료 내고 표받을 때 직원분이 '아직 어두어지려면 멀었는데 어두울 때 보는 것도 참 좋아요~​.^^"하시더라구요.

당장 어둡지 않다고 나중에 다시 오긴 번거롭고 좀 있으면 어두워질텐데 굳이 밖에서 기다릴 필요가 있나 싶어서 들어갑니다~^^ 

 

 

천천히 혼자 놀면서 기다리니 슬금슬금 어두움이 드려지면서 조명도 켜지고 낮과는 다른 분위기가 드리워지면서 아름답더군요. 그렇게 아예 삼각대까지 설치하고 어두워지고 조명이 켜지길 기다리​다가 사진찍기 좋을 때 바로 사진찍어대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저는 객지에 혼자있단 생각에 겁이 살짝나서 길을 잃을까봐 얼른얼른 돌긴했지만 낮에 왔을 때와 다른 분위기의 안압지도 가 볼 가치가 ​있다고 추천할 수 있어요. 마치 덕수궁이나 경복궁 같은 궁궐 야간 개장할 때 가볼 때 낮에 느낄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처럼....^^

그렇게 분위기에 취하고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는 나와서 저녁을 먹기 위해 당시에 부모님께서 종종 가시던 성동시장에 있는 식당에 가려고 하니 문닫을 시간이라서 여행오기 전 알아두었던 밀면 집을 찾는다고 헤매던 중에 더는 움직일 힘도 없고 몸 상태도 아니라서 결국 눈에 보이는 중화요리 집에 들어갔는데 잘 들어왔다 싶었어요.

 

남은 음식을 싸주는지 물어보고는 자장면과 함께 시킨 탕수육이 레몬이 들어가서 느끼하지도 않고 상큼하니 맛있었어요.

허기져서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죠.^^

지치고 배고픔에 종업원들의 눈치를 본의 아니게 보는 바람에 사진을 못 찍었지만 최고였네요.^^  

 

이렇게 첫날은 저물어 가네요.

​많이 즐겁고 재미있었던 것 만큼 힘들고 지쳤어요. 이날 푹 잘 잤던 것 같아요.^^

둘째날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다녀왔어요.

입장료가 불국사와 석굴암 각각 40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이 길을 쭉~ 걸어가면 이렇게 자하문과 계단이 보이죠~.​ 옛날엔 저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으나 보존과 보호차원에서 저렇게 난간을 치고 못 들어가게 해두었죠.

뭐 예전에 한창 공부할 때에 청운교, 백운교 밑에 물이 흘렀고 그런 수로시설도 되어 있었다고 듣기도 했는데 방문 당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난다...!^^;;;

 

 

 

 

 

 

 

 

석가탑은 균열이 발견되어 수리(?)를 하여야되서 저렇게 해체를 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마무리가 다 되어갈련지...!

방문 당시 어릴 때 봤던 기억 속 석가탑을 경주박물관에 있는 모조품이 아닌 진품을 볼 수 있단 기대에 설레었는데 저렇게 해체 보수 중인 석가탑을 보니 많이 아쉬웠다...!ㅡ.ㅜ

대신 다행히 나름 보전이 되고 있는 다보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이날 돌아보면서 불국사가 워낙 오래된 사찰이자 건물이고 탑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석가탑만이 아니라 대웅전 쇠기둥으로 받쳐두어서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삼각안내표지판이 있었고, 무설전 뒤에 있는 비로전과 관음전도 오래되어 무너지거나 다칠 수 있는 가능성에 그물망이 쳐져 있고 역시 쇠기둥으로 받쳐져 있으면서 못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 아쉽게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어릴 적 불국사 구석구석 다 들어가 봤던 것 같은데...! 역시 세월이 많이 흘렀나 봐...!^^;;

 

 

 

 

 

 

 

 

 

이 금돼지가 복을 가져다 준다는 안내문 때문인지 만져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외국인들도 많았고 다 보고나서 지하문 앞 나무 그늘 에 잠시 앉아 있을 때 덩치 큰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내게 대만에서 왔다는 관광객이  지하문과 청운교, 백운교를 배경으로 사진 찍어달라는 말을 간단하고 짧은 영어와 손짓, 발짓으로 부탁하고 나도 한자 공부를 소원했던 것 만큼 대학 졸업하고선 바로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좌절되는 통에 낙심하고 바로 영어를 손 놔버린 것을 후회하면서 손짓 발짓해가며 겨우 겨우 찍어줬는데 아직도 똑딱이로 나름 괜찮게 찍어줄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 해서 아직도 땅을 칠 정도로 아쉬움이 크다.

불국사에서 나와서 석굴암으로 가려면 차로 이동하여야 해서 버스를 기다렸다가 불국사로 향했고 결국 고정물 및 염증제거한지 얼마 안된 왼쪽 발목을 포함해서 사고로 다쳤던 두 다리의 통증으로 부모님께 등산스틱을 빌려오지 못 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쉬엄쉬엄 올라가서 내려오고는 "아이구 살 좀 빼야겠구먼...!"하는 노점하시는 어르신들의 말을 뒤전으로 흘리고 불국사에서 아래쪽에 있는 주차장에서 시내 쪽으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다가 때를 놓친 점심을 또래 어머님, 아버님 같은 어르신들께서 하시는 식당에서 그닥 맛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친절하고 편안하게 먹고 한숨 돌리곤 나왔다.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까지 절뚝거리며 걷는 것을 보고 할머니께서 걷는 게 다리가 불편해 보인다고 하셔서 민망함에 사고로 다릴 좀 다쳤다고 무리해서 좀 걸어다녀서인지 다리가 좀 힘들다고 하고선 말았네요.^^;;;

 

이날은 무리했다는 생각에 테디베어박물관에 가고 싶어서 계획하던 것을 철회하고선 바로 숙소에 들어가서 쉬는데 들이닥친 중국인 같은 단체 관광객들 땜에 엄청 당황했어요.

그래서 게스트 하우스 관계자분에게 전화하고 안되는 영어해가며 손짓발짓 하는 듯 마는 듯 했지만, 다행히 그들이 유창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한국어 회화가 가능해서 소통하는데 제가 묵었던 곳이 아닌 5분 정도 떨어져 있던 다른 게스트 하우스였고, 때마침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확인했던 터러 설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기도 하고 그들이나 나나 경주에는 이방인이기에 직접 안내해주기로 하고 어딘지 알겠으니 따라오라고 해서 바래다 주고는 뿌듯~!^^


일찍 자고 싶었는데 양쪽 다리의 심한 통증과 세월호 땜에 깊이 잠들기 힘들었고,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게스트 하우스 의 바깥사장님 덕분에 마지막날 경주 최씨 고택과 향교를 방문했네요^^

 

 

 

 

 

 

 

 

 

나른한 봄 날씨에 얼룩이 고양이도 느긋하게 나들이 나왔네요​

편안하고 평온한 집이에요. 경주 최씨 부자가 얼마나 부자이면서도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아왔는지 알 것 같아요...​!

 

 

최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육훈』인데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 안에 칠해진 것이 지워져서 잘 보이질 않지만 그 가르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덕망이 되는지 알 수 있고 좋은 가르침이 되어요.

 

 

 

 

 

 

 

 

 

아까 봤던 그 고양이가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유유자적 제 집인 양 잘 다니고 그러네요.^^

 

 

 

 

 

 

 

 

 

 

사람이 살지 않는 고택이 아닌 거주하고 있는 고택이라서 개방이 한정되었지만 그래도 얼마나 큰 집이고 부호였는지 가늠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근처에 옛 최씨 고택이었던 곳 일부 중에 나그네나 객인들을 보호하고 대접했던 건물을 이용하여 <요석정>이란 식당을 하고 있는데 1년여 뒤에 어버이날을 맞아서였나 엄마 생신이여서인가 동생내외가 저까지 초대해서 가봤더랬죠.

하지만 음식이 최씨 집안 대대로 내려왔던거라 생각하기엔 너무 장사속이 보이는 면이 없지 않네요....^^

한번 가봤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른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혼자 방문했던 날 최씨 고택에서 나오면서 좀 비싸고 양은 좀 아쉽지만, 부모님께 드릴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대로 빚은 교동 법주를 한병 사들고 나왔네요. 

 

자 다음은 경주 향교~ ​!

 

 

 

 

 

 

 

 

 

 

 

 

 

이날은 사람도 없고 행사나 체험이 없어서 무척 조용하고 조용해서 이렇게 왔다갔다 돌아다니면서 설치는 것이 죄송스러울 정도로 조용했어요^^;;

그동안 사용하였던 미니홈피를 정리하고 네이버 블로그로 이사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고, 다시 티스토리에도 포스팅 이사를 하는 것도 역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네요. 에너지도 많이 소비되기도 하구요.^^

 

아직 옮겨오거나 할 이야기들이 많네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함께 가야할 것 같아 힘들지만, 이제 익숙해져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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