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마살 여자의 방랑기/걸어서 세계 속으로 1

[대구/당일치기] 빗속에서 걸어다닌 대구 근대문화 골목 방문기

by Esther♡ 2023. 7. 23.
728x90
반응형

 

 
지난 18일 대구에 볼일이 있어서 폭우를 뚫고 달렸다.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이렇게 다산다난할 줄은 갈 때는 몰랐다.
 

 
이미 1주일 가까이 늦은 방문기라 이미 결과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지만 이날 볼일 보고는 긴장이 풀렸는지 현실의 삶으로 돌아와 허탈하고 삶의 무게가 갑자기 몰려와 짓누르는 덕에 달달하고 진한 무언가가 당겨서 지하철 역까지 와서는 더는 움직이기 힘들어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그렇게 주문해서 받은 아이스티와 치즈 조각케익을 앞에 두고 먹먹함과 허탈함, 공허함이 몰려와서 힘이 나지 않아서 잠시 멍하게 있었다.
 

 
너무 성급하게 기운차리려고 하지 않고 천천히 차고 달달한 아이스 티와 묵직하게 진한 치즈 조각케익을 먹고 마시며 숨돌리며 당장의 사나운 비가 좀 진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기운을 좀 차리고는 비가 여전히 드세긴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잦아 들었을 때 눈 앞에 보이는 저 선로를 따라 한정거장 떨어져있는 청라언덕으로 향했다.
 
몇년 전 그날도 칼날같은 햇빛이 쨍쨍하던 여름이었던 어느날 역시 볼일이 있어서 대구 왔을 때 청라언덕을 다녀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찾아보지만 관련 글이 어딨는지 안보이네.^^;;
 
동산병원 남문 쪽으로 올라가면 COVID -19 관련 전시관이 있고 거길 지나 가면 보이는 건물의 뒷편으로 돌아가면 나온다.
 

 
눈에 익은 치즈냥이들 두마리.
전에도 왔을 때 본 것 같은데…! ^^;;
 
얘네는 늘어지게 오침을 즐기다가 인기척이 있으니 쳐다는 보는데 평소 근처에서 돌보는 사람들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내가 와도 만사가 귀찮은 표정이다.^^;;;
그냥 귀찮다, 얼른 가라하는 반응에 이리 귀찮게 하고 저리 만져봐도 경계하지도 않고, 울음소리 내거나 솜방망이 휘두르지도 않고 또 귀찮은 애 나타났네...!하는 반응이니까 섭섭하고 서운해서 칫~! 그래 간다, 가~!하듯 지나쳤다.
 

 
청라언덕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곳으로 당시 외곽 황무지였던 땅을 1899년 아담스와 존슨 선교사가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매입한 작은 산으로 이후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고 한다.
청라언덕의 청라는 푸른 담쟁이 덩굴을 말하는 걸로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청라언덕이라고 할 만큼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었었고 20세기 초 개신교 선교사들이 모여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외곽지고 황무지에 무덤이 즐비하던 덕에 가난한 사람들 아니면 아무도 가서 살려고 하지 않던 곳이었던지라 흰 피부에 벽안의 외국인들을 가뜩이나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양반님네 지역이던 대구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쫓아낼 요량으로 고을 원님, 목수 같은 지위 있는 이들이 마지못해 거기에 자리 잡거나 일하도록 허락했다는 말이 있던 곳이다.
근데 그런 곳이 독립운동과 신앙과 학문의 근원이 되어 그것이 차고 넘쳐 흐르게 될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 것이겠지.^^
 

 
이날 갔을 땐 선교사 사택 세 곳 다 2023년 4월 25일부터 문화재 보수공사 기간을 갖고자 휴관 기관을 연장한다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오래간만에 비바람을 뚫고 갔는데 하필 보수공사로 인해 휴관에 재개관 시기는 문화재 보수공사와 전시 개편 이후 결정할 예정인 만큼 그 시기는 추후 공지하며 아직 미정이라고 하니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120여년의 시간을 견뎌왔고 그만큼  역사적인 중요한 사료가 되는 건축물이니 그만큼 앞으로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수리보수기간을 갖는다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한국에 근대 건물이나 적산가옥이 잘 보전되어 있는 경우가 잘 없다.
군산 지역이나 부산, 포항 등의 일부지역에 있는 적산가옥도 그렇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같은 건물이나 근대 건물로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 것들은 지키는 것이 옳으나 빠르게 없어지는 것이 많이 아쉬움이 든다.
 
지금은 많이 없어지고 선교사님 사택이라고 보존되어 있는 것은 대구 청라언덕에 3채가 남아 있고 한남대학교 교정에도 선교사촌이라고 해서 건물이 6채 정도 남아 있는 듯하다.
 
청라언덕에도 선교사님들이 많이 사셨다고 하였고 지금 내 나이쯤 일 때 우리 부모님은 아이 셋을 낳고 둘을 키우고 있고 또 한 생명을 복중에 있을 정도로 연세가 있으셔서 각자 호주 선교사와 미국 선교사에게 인연이 있던 에피소드가 있으시고 아버지는 기술을 배우러 경주 나오셨을 때 대구, 경북지역에서 활동하시던 미국 선교사님께서 때마침 경주에 왔다가 지나가는 아버지를 보시고 말없이 따라와 지켜보고는 도와주시기 위해 먼저 손 내밀어 도움을 주고 후천적인 사고로 급한 수술만 하고 만 다리를 미국 부유한 후원자의 지원으로 재수술하고 의족과 재활을 할 수 있게 되셨는데 아버지께서 지금의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재수술을 하기 위해 선교사님 사택으로 먼저 방문하셨는데 당시 청라언덕에 있었다고 하셨으니까. 
 
그래서 전에 청라언덕 다녀오고 나서 대구에 서문 시장 근처에 동산병원 뒤쪽으로 청라언덕이 있던데요? 거기 선교사님들 사택이라고 보존되고 있던데요?하니 있지! 최근에도 간듯이 아른아른하신 듯한 표정을 봤었다.
 
 

 
여긴 사택만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관 현관과 고압산소 치료기가 보존되어 있다.
제중원이 전신인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 현관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서 2002년 5월에 등록문화재가 되었다고 한다. 2010년 도시철도 3호선 공사로 인해 여기 중앙현관부분만 떼어와서 보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건물 전체를 이동하기는 힘들었겠지…?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고압산소치료기도 함께 보존 중으로 가압장치 안에서 환자에게 산소를 흡입시키는 의료장비로, 일산화탄소의 급성중독 치료같은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 미국 북장로교 소석 Van Cleve 선교사가 가져온 설계도 바탕으로 대구 한성메디칼(구 한성 공업사) 고 최운한 대표가 국내 최초로 만들었다는데 2012년까지 대략 40년을 사용했다고 하니 오래 사용되었고 이 장비를 모델로 전국에 확산되었다고 한다.
난방으로 연탄으로 할 때 한창 가스중독으로 사경을 해매는 환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는데 누군가를 궁휼하게 생각하고 그걸 만들어 이용할 수 있게 해야한단 생각으로 실행하는 이들의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거다.
 

 
안에 들어가보질 못하니 외곽을 둘러보고 사진을 남기고 있는데(DSLR을 두고 미러리스를 챙기고 폰 카메라가 콤팩트 디카의 시장이 축소될 정도로 발전한 것이 다행이고 감사할 정도다.) 정신없이 쓰나마나인 우산을 들고 조금이라도 덜 젖으면서 깨끗하게 남기고 싶었는데 그건 안쉬웠다.
 
전에는 그냥 외관은 대충 보고 안에 살펴볼 수 있는 걸 살펴보겠다는 생각으로 살폈다면 지금은 휴관이라 내부 관람이 안되다보니 외관이라도 꼼꼼히 살피고 볼 요량으로 주위를 안살피고 열중해 있었더니 저 사택과 함께 보존되어 있는 동산병원 구관 현관 사이에 있는 해설사의 집에서 지켜보고 계시던 분이 "거기로는 못 가요~!"하셔서 퍼득 정신차리고 동그랗게 눈 뜨고는 바라보니 한번더 말씀하신다.
 
그래서 앞을 보니 그제서야 쏟아지는 비로 인해  큰 웅덩이가 있어서 못 가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해설사 분의 배려로 젖은 몸 말리며  차 한잔 마시게 되었고 그 분의 배려와 안내로 은혜동산으로 가서 펜스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구 은혜동산은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원과 같은 곳으로 선교사님들이 개인적으로 묻히신 곳들도 있지만 이렇게 모여있는 경우도 있는데 은헤동산과 양화진 외국인 묘원이 그 예이다.
풍토병으로, 전염병으로, 자신의 삶이 다하여서 가족을 묻고, 이후 자신도 그 땅에서 묻히길 원하여서 그렇게 영면하시는 일이 많다.
 
대학을 기독교 학교에 다녀서인지 선교나 신학관련된 수업을 듣거나 선교 오리엔테이션 훈련을 받을 때 자주 듣던 마포 삼열(한국명, 본명 : 새뮤얼 모펫 Samuel Austin Moffet) 선교사님의 다섯명의 아들 중 선교사역에 두명의 아들이 헌신하고 그 중 넷째 아들인 하워드 모펫선교사님이 청라언덕에서 살며 동산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셨고 이후 93년도에 미국으로 가셨을 때도 많이 그리워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소천 이후 내외분은 여기서 함께 영면하셨던 모양이다.
 
우리 아버지를 도와주셨던 선교사님 내외분도 그 맘 때 고향으로 가셨다는데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님들이 그때 고향으로 가셔서 쉬셨던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은인이시던 선교사님께서 본국에 귀국하시기 전에 만나서 이야기하고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는데 아쉽게 그러지 못 하셨며 그때 인사라도 제대로 하고 돌아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가 섞이셨다.  그 선교사님은 평소 한국에서 영면하시길 바라셨던 터라 경주에 있는 어느 학교 교정 한곳에 쉬시게 되었고 탈메이지 선교사님의 막내딸이기도 했던 사모님도 역시 남편 곁에 쉬길 바라셨지만, 그러기위해서 드는 돈으로 아껴서 아직도 어려운 지역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쓰이도록 하고는 본인은 지역 교회 납골당에서 쉬시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찌 마지막까지도 그렇게 남을 위한 삶을 사시려고 하셨는지….
 

 
선교사 사택이 모두 휴관이라 들어가보지 못 했는데 근대 건축양식에 대해서는 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사료로 가치가 크다고 느낀다.
부산에 있는 임시정부 기념관이나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처럼 옛 건축방식을 유지한 건축물들은 그 시대의 건축양식을 알고 건축법을 알아가는데 중요한 자료이자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니 잘 유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임시정부 기념관도 1920년대에 지어진 것이라 중간에 보수가 없던 것이 아닌데도 잘 유지되어 있어서 정말 좋았던 것처럼 그렇게 부디 오랫동안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대구 제일교회와 선교사님 사택 사이에 종탑이 자리잡고 있다.
동산의료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담장 허물기 첫 행사로 철거한 동산의료원의 정문 및 중문 기둥과 담장을 옮겨 세웠다고 한다.
쳐볼 수 있다고 하는데 예전에 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칠 수 있게끔은 되어 있지 않았고, 밑에 종을 치지 말라는 안내문이 되어있다.
전에 사람들이 종을 움직여 칠 수 있게 밧줄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수시로 쳤었나 보다.
 

 
1899년 아담스 선교사와 존스 선교사가 들여온 서양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으로 자란 2세목도 2010년이후 고사되고 18년도에 보호수 지정 해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2세목의 흔적은 남아 있다.
 

 
2세목이 살아 있을 때 고사를 대비하여 2007년에 육성하여 12년도에 옮겨심은 3세목도 있는데 100여년의 시간을 3세대로 이어 이 땅에 뿌리내어 역사를 지키는 것도 대단한 것 같다.
약을 치고 비료와 퇴비를 주며 돌보는 것이 아닌지 열매는 돌사과처럼 엄청 작디작은 열매지만, 풋풋한 풋사과가 여러개 열려 있었다.
진짜 자세히 보면 장난감 모형같은 사과여서 귀여움도 흠씬 묻어나왔다.^^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였니?^^
 

 
청라언덕에 옆에 자리 잡은 대구 제일교회는 대구지역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로 1893년  윌리엄 마틴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한국명 배위량) 선교사가 개척하고 제임스 E. 아담스(James E. Adams, 한국명 : 안의와) 선교사가 초대목사로 사역하면서 차츰 교세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지금 약령시가 있는 중구 남성로에 구 교회당에서 1996년에 지금의 동산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3.1운동 계단으로 가기 위해 네이버 지도 앱을 열어 좌표찍고 가는데 대구 제일교회옆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어 그쪽으로 따라갔다.
제일교회 옆으로 내려오면 신명고등학교 방향으로 내려오는데, 신명고등학교가 신명여학교일 때 서울 3.1운동의 영향으로 학생의거가 일어나면서 연관이 되어서인지 담장에 저런 조형물들이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와 관련된 설명과 학생의거에 관여되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을 소개되고 있는데 이렇게 특정한 일이나장소, 단체 등과 관련된 역사와 인물들을 소개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좋았어요.
이렇게 소개하는 것을 보면 그간 잘 모르던 것도 알게 되고 관련된 인물들과 해왔던 일들도 알게 되는 것같아 정말 엄지 척! 두번 척~!!하게 되는 것 같아요.
 

 
3.1운동 계단에 드디어 도착했다.
근데 전 저 위로 가는 거였는데 지도를 따라오니 이 곳으로 와 있었다. 이런…! ( ̄_ ̄|||)
 
총 90개의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3.1운동 계단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의거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3월 8일 대구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학생들이 당시 이곳이 울창한 솔숲길이어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집결장소로 갈 수 있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솔밭길을 통해 시내로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3.1운동 계단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아담한 길이라고 하지만 올라가볼 생각을 못 했다. 
 
올라가보고 싶기는 했으나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로인해 물이 콸콸 흐르는 탓에 올라가볼 생각조차 못 했다.
다음에 숙소 하나 잡고 몇일 작정하고 올라왔을 때 천천히 다시 돌아봐야겠다.
 
학교 다닐 때 왜 이런 곳을 몰랐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3.1운동 계단을 지나 맞은편 골목길을 걸어나가면 계산 오거리 매일 신문사 옆에  계산성당이 있다.
정식 명칭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게산 주교좌 대성당'이지만, 동상 계산성당이라고 불리고 있고  1885년 12월 대구본당이 외국인 신부님을 통해 신설되고, 초대 본당 주임으로 프랑스 신부님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1886년 조불 수호통상조양기 체결된 뒤에도 조심스럽게 전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황무지이지만, 노인 신자들의 요청으로 평지에 지어진 성당은 1901년 당시 발생한 지진으로 제단의 촛대가 넘어지면서 발생된 걸로 추측되는 화재로 전소되고 지금의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경상도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이라고 한다.
역시 여기도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으로부터 관리를 받으며 가끔 유지보수를 한다고 한다. 
 
당일 평일이여서 문이 열려 있는지 알수가 없었고 비가 내리고 있으니 적은 몸으로 들어가 보기에 망설여져서 들어가볼 생각을 못 했다. 외부 모습도 아름답지만, 내부와 스테인글라스가 아름다운 것 같던데 정말 기회가 된다면 들어가서 보고 싶다.ㅜㅜ
 
여담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했다.
개신교에서도 커플이 신자이거나 한쪽이 신자이고 한명은 최소한 세례를 앞두고 있어야 목사님 주례로 교회에서 식을 진행할 수 있고 카톨릭도 혼인성사? 혼배미사?? 이것을 하려고 하면 신랑, 신부 중 최소한 한명은 신자여야 가능하고 결혼 전에 주례집전하는 신부님을 만나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모두 카톨릭 신자가 아니였다. 아무래도 당시 한국전쟁 중이라 마땅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이 가능했다. 
 

 
 
 

 
싱그러운 향기가 퍼지는 듯한 비오는 거리가 주는 분위기는 정말 좋다.
하지만 이렇게 우산 쓰나 마나 할 정도로 내리는 비에 옷이 일부만 젖는 것이 아니라 전부 홀딱 젖다시피해서 감기 안걸리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ㅜㅜ 
 

 
계산예가와 이상화 시인의 고택 사이에 있는 인력거는 운행가능하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날은 세차게 비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아무도 하는 이들이 없었다.
 

 
계산예가 옆에 자리잡은 이상화 시인의 고택으로 향했는데 전부터 방문하기 위해 버킷리스트에 올려두고 찾아봤을 때는 서상돈 고택과 마주보고 있다고 하던데 난 못 찾아봤다.
 

 
그렇게 들어가본 이상화시인의 고택은 고즈넉하고 소박했다.
입구에서 보는 우중 저택 풍경은 정감이 갔다.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위암으로 작고하신 1943년까지 기거하신 곳으로 여러번 주인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건재했고 잘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 신기하다.
 

 
저항시인인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독립운동을 지원한 기업가 서상돈의 고택은 업적을 기리고 서상돈 고택은 원래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기념재단과 국민들의 성원으로 지금의 자리에 옮겨서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상돈 고택은 바로 옆에 마주보고 있다는데 찾아보지 못 했었고, 처음 모습보다 축소되어 복원되었다는데 축소되었다는 것에 아쉽고 근처까지 갔다가 못 찾아서 보지 못함이 역시 아쉬웠다.
 
이 역시도 다음을 기약하는 것으로…. (┬┬﹏┬┬) 
 

 
점심시간이 늦어서 먹고 가려고 헤매다가 점심이고 뭐고 간에 식당 찾아 해매다가 근처에 약령시가 있고 거기에 제일교회 구관과 한의약박물관이 있어서 뭐에 홀렸는지 약령시로 흘러갔다.
 

 
어째 제일교회 구관과 한의약 박물관이 나란히 있는지…. ^^;;;
먼저 제일교회 구관으로 먼저 향했다.
지금 있는 구관도 3번째 건축물로 1992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기도 하다.
근방에서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구관이 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된 역사적인 건물이 마주보고 있는 것도 의미가 있는 듯하다.
YMCA회관이 맞은 편에 있는데 이 역시도 확인 못하고 폭우경보가 발동될 정도로 쏟아지는 비에 식겁하고 나라린히 있는 제일교회 구관과 한의약 박물관만 보고 후딱 왔네. ㅜㅜ 
 

 
초상권과 함께 재산권? 그런 거로 인해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어서 대놓고 찍을 수 없어서 눈치보며 가려가며 찍었었다.
들어가서 오른쪽 입구로 들어가서 관람을 했었는데 교회의 개척을 시작으로 역사적인 흐름이 소개되고 개척하시고 전도하며 자리 잡고 부흥시킨 선교사님들도 소개하고 있다.
 
예전 복음이 들어올 시기에 말씀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낮은 계층은 고단한 삶에서 오는 무언가에 복음을 전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상대척으로 수월하였으나 양반, 배운 자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오는 오만하고 교만으로 인해 복음 전달하는 것조차 많이 어려워서 계층과 선입견, 편견 등을 깨부시는 것도 큰일이었고 특히 대구는 양반, 사대부란 자부심에 보수적인 문화로 콧대 높은 반가의 사람들 마주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말씀의 뿌리가 내리고 성장하는 것을 보면 신의 영역은 사람의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 같다.
 

 
선교사님들이 말씀을 전하고 계몽에 힘쓰고 의료/보건, 교육 등에 애써온 건 당연하고 복지적인 역량이 지금같지 않은 시대에 소외되고 천대받던 장애인과 보호받아야하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것을 그분들의 자서적이나 위인전같이 서술된 내용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더욱이  A. G. 플레쳐 원장은 고아로 친척들을 통해 신앙을 가질 수 있었고,  의대를 졸업한 후 2년간 개인병원을 운영하다가 해외선교사로 나갈 것을 결심하고 해외파견 신청서를 제출하셨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와서 사역하시고 동산병원에서 재임하여 의료적인 역량을 넓혔는데 나병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인술을 펼치셨다고 한다. 나중에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당시 적대국인 미국을 비롯해 서방국가 사람들 특히나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반항적인 이들을 갖은 꼬투리를 잡아 강제추방하거나 괴롭히는 것을 넘어 감옥에 투옥시키는 경우까지 생겼는데 자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서방국가 외교관들과 책임자들이 자국민들에게 큰일당하기 전에 철수하도록 권고했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한국땅에 남아서 그땅에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대항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분들 중에는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강제추방되어 떠나게 되는데 결핵퇴치를 위해 애쓰고 크리스마스씰을 한국에 소개하여 정착하게 했던 셔우드 홀 선교사님도 일제의 말도 안되는 꼬투리를 잡아서 간첩협의를 씌워 잡아들이려는 걸 어마어마한 벌금을 지불하고 결국 인도로 가서 새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고, 우리 아버지를 도와주셨던 레이몬드 프로보스트 선교사님의 장인이신 탈메이지 선교사님도 말씀도 전하셨지만, 젊은이들이 무지에서 벗어나게 교육에 힘쓰셨고 독립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호하고 일제에 대항하다 감옥에 투옥되어 고초를 당하셨으며 고문까지 당하셨다고 하는데 그 말을 전해들었을 때 충격이 심했었다.
 
외교적인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투옥까지도 안하려던 일제였기에 가급적이면 꼬투리잡고 괴롭혀서 스스로 떠나게 만들던지 아니면 강제추방으로 나가게 했는데 결국 완강한 탈메이지 선교사님이 미워서 투옥하여 고문까지 감행했고, 끝까지 남아 있던 몇 안되는 선교사 중에 한명이던 탈메이지 선교사님을 결국은 강제추방으로 쫓아내었다고 한다.
 
사진 속 플레쳐 원장도 41년도에는 1년여간 집에서 연금당하기도 하고, 부부가 대구에 끝까지 남아 있다가 결국 43년 8월에 한국을 떠났으나 그의 손자 존 플레쳐의 말에 의하면 본국으로 바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평양 전쟁 포로로 중국에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는 등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북경에서 미군을 만나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탈메이지 선교사님처럼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국으로 와 사역을 하셨다고 한다.
이때 탈메이지 선교사님이나 플레처 선교사님처럼 그렇게 일제에 의해 억울하게 추방당했으나 해방 이후에 다시 한국에 와서 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행하는 분들이 많았고, 그렇게 헌신하셨으며 그러지 못 하더라도 이후 한국 땅에 잠들길 바라시고 유언까지 남기며 본국이 아닌 한국에서 잠드신 분들이 많이 있다.
 
그걸 보면 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한다면 당연히 절레절레~! 엄두가 안날 것 같다.
 

 
33년 당시 세번째 교회당의 건축당시 벽면이라는데 지금은 생각하기엔 상당히 사포처럼 거칠다.
그 당시엔 이마저도 상당히 좋은 재료로 잘 지은 거겠지…?^^
 

 
꺅~~~!!! 이것이 반가운 거라면 난 진짜 옛날 사람인가 봐~!!^^
이게 왜 이리 반가운 거니?^^
유치부 때랑 초등부? 아동부 초기까지 교회에 주일학교할 때면 저것이 앞에 있서서 저거 보고 작은 입으로 신나게 따라부르고 했었는데 저기에 있는 것을 보고 어찌나 반가운지.^^
ㅋㅋ 나도 옛사림이긴 한가 보다.^^
 

 
저기 전시되어 있던 물건들 중에 한켠에 모 목사님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한 곳에 전시되어 있던데 정말 재산 하나 안남기고 모든 걸 교회 사역과 후임 목사님들 및 은퇴 목사들의 사역 및 안식을 위해 바치시며 청빈하고 욕심없이 하셨던 것에 정말 청지기적 목회자의 모습이 이런 건데…! 하는 생각에 어릴적부터 다음은 괜찮을거야, 괜찮아질거야하며 지켜보며 상처가 되었던 교회 안에서 보고 접한 안좋은 경우들이 떠오르며 씁쓸했다.
 

 
저 블로문을 지나서 바로 옆에 있는 한의약박물관으로 향했다.
예전에 서울갔을 때도 한의약 박물관이 있어서 가볼까 했는데 가볼 곳들이 많아서 동선이 꼬이는 바람에 빠트렸는데 대구에 있는 한의약 박물관에 가본다.^^
 

 
한약, 한의학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관계된 사람들을 명칭하고 설명이 간략하게 그림과 함께 했었다.
약령시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면 온갖 이유와 이해관계들로 모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근데 한약을 중개하고 은행과 같은 역할도 하는 객주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아는 건 의생이나 심마니, 심약 정도이지 다른 건 잘 몰랐으니까.^^
 

 
대구에만 약령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고이는 곳마다 크고 작게 생겼을 것이고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몇날 며칠 걸어서 오거나 말같은 걸 타고 달려오거나 해서 여러날 묵고 가야해서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객잔말고도 주막이나 여관, 식당 등이 즐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객주가 도매상, 중개상의 역활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고 돈이 가장 많이 모이고 돈의 흐름이 가장 큰 곳이니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데 옛 생활도구 중에 밥공기, 국대접을 보면 옛날 사람들의 위는 얼마나 컸던것일까 싶을 정도로 그릇들이 다들 큼직막하고 숟가락도 지금보다 큰 것 같다.^^;;;
 

 
지금도 양방의학이던 한의학이던 발달된 의학기기들도 있고 많이 이용들을 하지만, 그래도 가장 기초적인 것들인 문진, 망진, 절진 등을 하는데 검사를 하려면 무턱대고 하겠다고 해서 다 하는 것이 아닌 어느 검사를 할지도 생각하게 하는 것도 저런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들을 하고 판단한다.^^
지금도 그러는데 저 옛날부터 해왔던 방법이다.^^
근데 약방 서랍이 왜이렇게 좋을까?^^
왜 이런 약방 서랍을 보면 미스터 션샤인이 생각나는지…! 떼잉~!ㅠㅠ
 

 
약을 달이고 약재 관리하고 도구들을 정리하고 일하는 것을 재연해둔 것을 보면 정말 옛날에는 지금의 한방의학보다는 더 정성이 들어가고 간절한 것 같았다.
 

 
천산갑이나 코뿔소 뿔 같이 지금은 구하기도 힘들고 집안 어른들 중에 한분이 요즘 한의사들이 의사냐고 장사치라고 빽~ 큰소리내실 정도로 안쓰려고 빼거나 줄이려고 할 정도로 비싼 약재들이 그때도 희귀한 약재이지만, 그만큼 귀히 사용하며 좋은 약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대로 약효가 최고다. 그래서 지금은 옛날만큼 한약이 옛날만큼 힘을 못쓰는 것이겠지.
 

 
지금은 잘 구하지 못 하는 재료들일텐데 당시에도 희귀한 재료들일 정도였고 지금은 대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날에는 수은이 보여지는 것이 있어서인지 해로울 거라 생각 못 하고 동, 서양을 막론하고 연금술에 사용되기도 하고 약으로 쓰거나 화장품이나 염료의 재료로 쓰이기도 하는 등   많이 쓰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위험성을 알려져 있는 만큼 우황청심환에서도 옛날에는 수은이 약재로 쓰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수은의 위험성이 많이 알려진 중금석이다보니 그걸 빼고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 우황청심환이 수은이 들어갔다고 지금은 위험성이 강한 중금속이란 인식이 강하게 되어 있어서 우황청심환을 만들 때 뺀다고 한다. 그러니 우황청심환에 아직 수은이 들어가는 걸로 생각하고 안먹으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경면주사도 옛날 한의학 서적들에도 그 위험성이 있어서 다루는 것도 조심하고 아무나 다루지 말고, 막 쓰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인데 앵간한 약에는 들어갈 일이 없으니 한약이라고 해서 무조건 경계하지 말아달라.
 
내 주변에 미우나 고우나 가족 중에 한의사가 있고, 잠시라도 인연이 되어서 아는 후배 중에도 한의사로서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살면서 양방의술의 도움도 엄청 받았지만, 양방의술의 능력이 닿지 않는 부분이나 효과가 더 좋을 부분은 한방의학의 도움을 정말 잘 받아서 그나마 잘 살 수 있는 한 사람으로써 부디 당부할 것이 있다.
지금 한의학에서 쓰는 한약재들 독성이 있는 약재는 충분히 신중하게 법제를 하여 중화시켜서 그 독성을 줄이고 독성이 강해서 위험한 약재나 수은같은 중금속들도 빼거나 애초에 잘 쓰지 않는 재료들은 가려서 빼고 애초에 흔히들 먹는 약에는 경면주사같은 약제는 들어갈 일이 잘 없고 사약재료 중 하나였던 투구꽃과 부자도 진짜 제대로 법제하여 쓰지 않는다면 사람 죽이는 독이 되는 것이기에 제대로 생각이 박힌 한의사나 한약사, 약재상들은 함부로 법제도 하지 않은 체 쓰지도 않고 팔지도 않는다.
 
옛날 대하드라마인 [허준]에서도 나오지 않냐.
허준이 의과시험을 치러 갈 땐가 한양에 가는 길에 가난한 산골 사람이 어머니가 아프니 비싼 약재값에 감당이 안되는데 죽어가는 어머니를 안타깝게 보는데 그걸 그냥 보고는 못 지나치던 허준이 이런저런 쉽게 살수 있고 구할 수 있는 재료들 몇개사오라고 해서 조제하여 달여 먹이도록 하는데 그중에 부자도 있었다.
어머님이 회복되는 걸 보고 허준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가 오는데 회복되던 노모가 다 죽어가고 있고 아들이 당신이 한대로 해서 먹였는데 어머니 왜 다 죽어가냐고 죽이네 살리네 하는데 허준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 물어보는데 아들이 머뭇거리면서 당신이 사오라던 부자를 드시고 좋아지시길래 그 뒤로도 사와서 먹였다고 그런데 저러신 거라고 뭐가 잘못된 것이냐는데 허준은 황망해 하며 그 아들되는 사람을 그걸 평범한 사람이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준 것이 다하면 그냥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식사를 잘 챙기라고 하지 않았냐고 크게 나무라는 장면이 나와던 걸 어린 기억에 본 기억이 있다. 
 
간혹 머리 잘못굴린 의사도 잘못이지만, 그런 학문과 지식도 없이 전문적 능력도 없으면서 약방에서 쉽게 재료 사와서, 혹은 캐서 먹고 하는 무지한 일들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방이라면 무조건 몹쓸 것으로 여기고 비난하고 트집잡는 양방의사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 밖에 안된다. 부디!!ㅜㅜ  
 

 
동물성 약재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도 있고 못 하는 것도 있다.
벽청이라고 하는 꿀은 약이 될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잘 못먹고 살던 시기에 영양보충이 되기에 약이 될수도 있는 것 같다.
웅담은 좋지 못 한 환경에서 웅담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곰들이 방송에 방영되기도 하고 동물권이 부각되기도 하면서 많이 제지가 되는 걸로 알고 있고 섬같은 한국에서는 호랑이들이 멸종되어서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다보니 더욱 더 약재로 구하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오소리도 암암리에 덫같은 것에 걸려서 죽은 거 아니면 구하지 못 하는 걸로 안다.
오소리 기름이 보습과 재생능력이 좋은지 화상입었을 때 엄청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공개적으로 구하지 못하다 보니 암암리에 알음알음 구하는데 우리 부모님도 내가 어릴적 몇다리 걸쳐서 들어왔는 것을 받아다가 유리병에 밀봉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자녀들이 다치거나 실생활에서 한여름 햇빛이나 불에 올려둔 조리기구나 뜨거운 물 등에 화상입었을 때 발라주셨는데 효과가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 그것들이 다 떨어지고 함부로 사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구하지도 못해서 없기도 하고 워낙 연고나 약들이 잘 나와서 구하려고 여기저기 다닐 것까지는 없는데 그래도 많이 아쉬운 것 같다.
 

 
여러 약재들도 볼 수 있었고 약재로 쓰던 식물의 표본도 볼 수 있다.
약을 만드는 도구들이나 채집도구들을 전시해서 볼 수 있었다.
한의학이나 한약재에 대해 알고 싶고 이해하기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찾아가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당일 방문했을 때도 한국인들도 있었고 가족단위 방문객이 다녀가기도 했는데 중국어도 들렸는데 중국인들도 제법 왔었다.
 

 
비오는 날, 납작만두와 떡볶이가 생각나지만 서문지장에서 많이 떨어져 있기도 하고 근처에 먹을 만한 곳을 찾아 해매다가 국수가게에서 얼큰한 칼국수 한그릇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더 늦기 전에 쏟아지는 비가 발목을 잡는 걸 넘어 인재를 당하지 않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동대구종합터미널로 향했다.
비가 쏟아지는 그날 전 무사히 집으로 잘 돌아 왔습니다.
 
 
 
 
 
 

☆ 개인적인 방문기입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곰팅이 같아도 감수성 풍부하고 여린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가시기 전에 꼭 부탁드려요.^^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