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행하는 첫날 짐을 주렁주렁 달고 가려다가 너무 강행군이라서 숙소에서 몇만원 더 주고 일찍 체크인하고는 예정했던 전쟁기념관에 다녀왔어요.
가는 길이 왜 이리 헷갈리는지…. >_<
오던 길과 달리 국방부가 있는 곳 앞으로 와서 광장을 통해 들어올 수 있었는데 전 손 안에 작은 지도를 따라 왔더니 주차장있는 곳으로 들어왔더라구요.
올라와서 광장을 보니 둥근 광장들 가장자리로 국기들이 있는데 태극기와 함께 한국전쟁 때 도와준 국가들 위주로 있더라구요.^^
입구를 마주해서 오른쪽에 있는 화랑을 따라 쭉~! 한국 전쟁 때 참전국의 전사자, 부상자와 베트남전 참전했던 한국군 전사자, 부상자들의 명단들이 있어요.
회랑을 따라 가서 맨 밑에 층부터 차근차근 관람했어요.
3,4층 정도 되는 건물 맨 아래층에는 우리 나라 기념적인 군사용 배인 거북선을 재현해둔 배가 있는데 안에도 텅텅 비어 있다기 보다는 당시 모습을 재현되어 있음을 대포 발사할 수 있는 곳이 열린 틈 사이로 봤을 때 볼 수 있었어요.
거북선을 둘러서 있는 전실에는 청동기 시절쯤부터 삼국시대, 통일 신라-발해시대까지의 이야기들이 설명되어 있었어요.
그동안 어디 가던 박물관이나 역사적인 장소들을 한군데라도 꼭 찾아가는 편인데 서울이나 부산을 가게 되면서 중앙 박물관이나 부산 박물관도 가보고 지금이야 울산에도 지역 박물관이 있지만, 어릴 때부 자주 가던 박물관이 경주 박물관이었고 신라에 대한 이야기에 편중되어 있었고 무기나 갑옷 등을 볼 수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보다보니 다양하게 볼 수 있었고 중앙박물관도 지역색을 떠나 더 큰 종합 박물관?? 그랬으니까요.
반면 전쟁기념관은 전쟁에 관한 거, 유엔 평화기념관이면 한국전쟁과 유엔군의 활동 등을 볼 수 있고 국립 강제동원역사관이면 일제시대의 수탈과 피해, 그리고 그에 대한 피해복원을 위해 어떻게 애써왔는지 등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처럼 한 분야에 깊게 볼 수 있는 있으니 전쟁이란 분야이지만 삼국시대와 발해, 고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보지 못 하고 알지 못 했던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반도는 진짜 작은 땅덩이인데도 무슨 전쟁이 그리 많이 있었는지, 조선 이전에도 고구려가 만주벌판 너머로 뻗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들끼리 영역싸움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고구려는 허구헌날 중국 및 위쪽 지역 나라들과 싸우고 신라는 허구헌날 일본 쪽에서 쳐들어오고, 고려 때는 몽골에서 치여 중국에 치여 왜적이 안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치였으면 조선에서는 좀 편해야하는데 호란, 왜란으로 진짜…!^^;
그러다 마지막엔 양요에 먼저 근대개화된 일본이 쳐들어와서 결국 일본에 굴욕적으로 복속되니 한반도에서 속 시끄럽지 않았던 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참 비참한 사건인데 아무리 못난 지도자라도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지 다른 나라의 자객들이 밤중에 쳐들어와서 한나라의 왕과 왕비를 쳐참하게 권위를 무너뜨리고 위협하거나 죽이고 욕보이는 일이 발생하는 일은 그 나라를 엄청 개무시하고 지독하게 선넘은 일이죠. 그럼에도 떳떳하지 않으니 쉬쉬하며 숨기고 거짓말하는 부분이 되겠죠.
일본은 이 사건을 축소, 왜곡하여 이야기했겠지만, 해외에도 뉴스가 타진되어 나간 것이 있고, 당시 조선, 대한제국에 있는 외국인들 중에 친일 계열이 아닌 그래도 일제의 부당함을 알고 밝히고 조선의 편에서 일하던 이들의 목숨건 행보로 밖으로 일본의 만행이 전해지기도 했지요.
뒤늦게 주권을 가진 근대 국가의 위상을 지닌 나라로 표명하고 발맞춰 나가려고 했으나 많이 늦었고 맥을 잘못 짚은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모양이라도 갖추던 것 중에 군대를 서양 군대를 표방하여 만드는 것이 있지요.
난 왜 저 군복을 미스터 션샤인에서 정희성이 후대 대대로 매국노로 남아야 할 위인들로 을사오적, 정미칠적인 역적들의 사진을 찍을 때 그들이 입은 옷들과 비슷해서 어찌나 화가 나던지…! (┬┬﹏┬┬)
그 군대마저도 일본의 더러운 야옥에 해산이 되고 주권도 뺏기다시피했지만요.
이후로 능욕적인 일들을 겪지요.
역시 미스터 션샤인에서 프랑스 첩자로 일본에 정보를 빼돌리던 프랑스 공사관 직원을 정삼문 대감에게 내어 주면서 유진 초이가 했던 " 전쟁을 해보면 말입니다.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도, 어떤 포수도, 지키고자 아등바등한 조선이니, 빼앗길지언정 내어주진 마십시오."란 말처럼 타의던 자의던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자 애쓰는 이들의 노력들이 있지요.
많은 이들의 독립운동 중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관련해서 전시되어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과 저서들도 있고 당시 사용했던 총과 관련 판화도 전시되어 있지요.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희성이 글에는 힘이 없다는 애신에게 글에도 힘이 있다고 누군가가는 기록해서 남겨야하지 않냐는 말처럼 누군가의 기록들이 남아서 그날의 일들을 전달되고 전해지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맨손으로, 때론 무력으로, 누군가는 국내에서, 누군가는 해외에서 그렇게 애쓴 끝에 시가가 맞아 독립을 했어요.
독립을 한지 했으나 남북으로 이념에 의해 갈등이 생기고 결국 일어나지 말아야할 한국 전쟁도 발생합니다.
이 이후론 한국 전쟁에 대한 전시가 이어져요.
한국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중에 피난가고 치열한 격전과 학도병 동원 등의 모습이 재연되어 있어요.
거제 포로수용소처럼 너무 리얼하게 재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마네킹의 위치나 포즈, 움직임 등으로 인해 화들짝놀라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긴 했지만요.^^;;;
서울을 뺏기고 탈환하기를 반복할 정도로 엎치락 덮치락하면서 휴정 협정 협의하는 중에도 전쟁 중이었고, 피해가 컸었죠.
독립운동차원에서 무력으로 하는 독립운동 보고도 많은 생각을 하지만, 한국 전쟁 섹션에서 정말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한 벽에는 사진들이 모여있었는데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참전 군인들이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면서 오는 중의 모습과 상황에서 오는 많은 감정들을 담겨있는 모습들이 담겨 있고 전쟁고아나 아이들을 신경쓰는 연합군들을 볼 수 있었지요.
여기 있는 사진 중에 전쟁고아인 아일라와 튀르키예 군이 함께 있는 사진이 있는데 영화 관련 종편방송에서 보고 한국-튀르키예 합작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되고 찾아보니 실화이더라구요.^^ 옛날 공중파 방송으로도 나왔더라구요.^^ 아직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이야기는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일라와 튀르키예 군과 함께 있는 사진 몇장을 보고 한참을 보왔던 것 같아요.
부산에 UN기념공원 쪽에 유엔군 묘원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한국 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은 자국군인은 전사자던 부상자던 생존자던 자국으로 어떻게던 자국으로 데려가는 미국의 성격상 남아있는 미군 묘 수는 적고, 전쟁 발발한 1951년에서~1954년 사이에 유엔기념공원에는 유엔군 전사자 약 11,000여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필리핀, 태국 7개국 용사의 유해 전부와 그 외 국가의 일부 유해가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어, 현재 11개국 2,320구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고 해요.
마음이 한구석에 몽글몽글 알 수 없는 감사한 마음들이 강했어요. 여담이지만 부산에 있는 유엔 기념공원과 조금 떨어진 곳에 국립 일제강제동원 역사관과 함께 있는 유엔평화기념관에 함께 가봤으면 좋겠어요.교육적으로도 방문하는 것이 좋은 곳들이고 역사적으로 유익한 곳이니까요.
파병과 의료지원국의 군복과 옷, 관련 물건들을 전시된 섹션에서는 고마움도 고마운 거지만, 울컥하는 속상함도 함께 있더라구요.
작년 가을쯤에 다녀온 부산 유엔 평화 기념관에서 이와 같은 섹션을 먼저 봤었는데 당시에 군복들을 보면서 이역만리 잘 알지도 못 하는 작은 나라에 와서 목숨내어놓고 싸우고 의료적인 지원을 하던 이들인데 아무리 당시 지금만큼 물질적으로 좋거나 풍요하지 않은 시기이지만 제대로 된 보급품들을 지원 받고 군복이… 너무 좋아보여서 마지막에 한국군 군복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허술해보여서 너무나 목이 매이고 속상하다 못 해 화가 날 정도였는데 나중에 한국전쟁을 유아, 아동기 때 겪으셨던 80대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전쟁 때 의료지원을 위해 온 사람들의 옷이나 파병되었던 군인들의 군복들과 보급품들이 좋아보이던데, 하다 못 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에서 파병한 군인들 것들도 그렇게 좋아보이는데 마지막에 한국군의 군복이며 보급품의 수나 질이 왜 그렇게 떨어지고 초라해보이던지 너무 속상했다는 제 푸념같은 말에 아버지께서 당시 그만큼 못 먹고 못 살던 시기에 전쟁이 났는데 잘 사는 나라에서 오는 군인들은 얼마나 지원이 잘 되었을 거며 자국 국인들은 그만큼 지원이 안되었겠냐, 다 그런 거라고, 그래서 국력을 무시 못 하는 거고, 나라가 힘이 있고 부강해야하는 거라시는 말을 하시더라구요.
1년여 만에 장소만 달리해서 마주한 의료지원 및 파병국가의 보급품과 의류들을 마주했을 때 새삼 같은 감정으로 보는데 서글픔이 있더라구요.
나라의 힘도 필요하고 잘 살아야하는 것도 있어야하는데 지금도 그때보다 더 살기 좋아졌음에도 군인이라면 대접하고 지원하는 미국과 달리 너무나 대우을 못 하는 한국인데 옛날은 참…! 어려운 시기에 더 대우를 못 해주고 초라함에 후손으로서 속상함이 극대화되는 건 내 몫이니…!
부디 군국주의, 제국주의는 싫고 법보다 총칼이 먼저 가는 것은 지양하는 나지만 그래도 자기 꽃다운 인생의 일부를 국방의 의무로 희생하는것인데 그들 덕에 후방에서 다리 뻗고 사는 걸 생각한다면 군내 기강은 좀 쎄게 잡더라도 대우는 좀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좀 크네요. 좆같은 시간이라고 침뱉고 욕하는 기억으로만 있는 것이 아닌 그런 기간이었어도 이런 거라도 있으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싶을 만큼 지원이 되고 부상병, 전사자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지원이 되었으면 싶은 마음은 있어요.
2번의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피격이나 이런 걸 볼 때 빡침이 없던 것이 아니니까요.
전쟁 중에도 재건과 학업에 대한 열의는 대단한 한국인이고 그 안에서 유엔군 및 파병온 군인들이 와서 전쟁하는 와중에도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고아원을 만들어 수용했고 천막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물품을 지원하는 것은 있었죠.
그것이 대한민국이 살아나고 지금의 위치로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겠죠.
그건 잊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해요.
남의 나라 전쟁에 우리가 왜 연류되어 생명까지 위협받아야하냐고 한다면 이때를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오후 2시 안되서 와서는 관람을 했는데 늦게 왔었나?
폐관이 6시인 걸로 알고 갔는데 5시 좀 지나고 나니까 더이상 당일 관람객 입장은 마무리되었다는 안내를 시작으로 10~20분간격으로 폐관 준비하고 있으니 안에 있는 관람객들은 다음에 방문하는 걸로 하고 관람을 끝내고 퇴징해주길 바란다는 안내가 계속되어서 결국 전시물을 얼마 남기지 않고 나왔어요.
거의 다 보고 나왔던 거라 아깝지는 않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마져 다 보지 못 하고 부랴부랴 최대한 많이 보고 나오려고 급히 훝듯이 보고 이렇게 떠밀리듯이 나오는 것이라 아쉽더라구요.
그렇게 나오면서 전쟁기념관에 형제의 상과 복제된 제 2 연평해전 때 격전했던 고속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갔지요.
전쟁기념관 한켠엔 서로 다른 군복을 입고 얼싸 안고 있는 동상이 있어요.
형제의 (동)상은 한국전쟁 당시에 각각 한국군과 인민군이 되어 적으로 만나게 된 형제의 비극을 작품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해요.
총을 어깨에 맨 장교가 형 박규철 소위로, 한국군 제8사단 제16연대 소속이며, 인민군 복장을 한 동생은 북한군 제8사단 제83연대 소속으로 참전한 동생 박용철 하전사로, 형제는 원주 치악고개 전투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전투 중에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았고, 서로에게 겨눈 총을 거두고 얼싸 안았다고 하죠.
45년 해방되고 황해도가 북의 치하에 들어가면서 과수원을 하고 있던 이 두 형제의 집은 지주계급이란 이유로 과수원이 뺏기게 되고 아버님이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형은 남한에 가서 공부를 더 하길 원해서 아버님께 허락해달라고 하고는 동생 용철에게는 부모님과 여동생 박금희를 부탁하고 남하했는데 그때 박용철의 나이는 20세가 되기 전이었다죠.
박규철은 남하해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에 가입했고, 국군에 자원입대했는데, 6·25가 발발하자 그는 일등상사로 전선에 투입되었고, 소대장이 부상으로 후송되자 소대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고향 황해도에 남아 있던 동생 박용철은 북한군에 강제징집되어 북한군에 하전사로 배치되었구요.
전쟁이 치열하던 어느날, 형의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나 “불효자식놈”이라고 호통을 쳤고, 그는 꿈에서 깨어나 엉엉 울게 되죠.
그 다음날 치악산 고개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박규철 소위가 이끄는 소대가 인민군을 추격하는데, 5~6m 전방에 도망치던 어린 나이의 인민군 하나가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박 소위는 인민군 병사를 생포하겠다는 생각으로 "죽이지 않을테니 도망가지 말라."고 소리지르며해 인민군 병사을 추격하는데 그 소리 듣고 고개돌리는 적병의 얼굴을 보니 바로 고향에 두고 온 자기 동생이더래요.
박규철 소위는 “너 박용철 아니냐”고 소리치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컸던지 그 소리 듣지도 못 한 동생 박용철은 도망치기 시작하자 박규철 소위은 뒤따라가며 “용철아, 나야, 니 형이야! 형.”이라고 소리쳤지만, 박용철은 계속 도망치다가 경사지에서 나무 뿌리에 걸려 쓰러지게 되죠.
동생 용철이 일어나려고 하자 그 순간 박규철 소위는 몸을 날려 동생의 몸을 덮치고는 “너 박용철이지?”라고 하자, 그 소년병은 “네”라고 대답하는데 박규철 소위는 “내가 니 형 규철이라고 하는데 왜 도망쳐”라고 하죠.
그 소리에 동생은 형을 알아보았고 형제는 서로를 끌어 안게 되죠.
형 규철은 동생을 끌어안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서 복귀하자 소대원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하는데 박 소위는 소대원들에게 이 인민군이 자신의 친동생이라고 밝히게 됩니다. 이에 소대원들은 형제의 만남을 축하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동생 박용철은 형이 소속한 부대의 배려로 국군으로 현지에 입대해 형과 함께 근무했다고 하죠.
형제의 사연은 치악고개 전투에 참여했던 안만옥씨가 1989년 전쟁기념사업회가 주관한 한국전쟁 참전 수기 공모전에서 입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윤성진 조각가 등이 '형제의 상' 조형물을 제작해 전쟁기념관 개관과 함께 전시하게 되었고 이 이야기는 천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요.
대학시절 태극기 휘날리며란 영화가 개봉되면서 처음엔 18세 미만 관람불가였나 그러다가 최종 등급이 청소년 관람불가가 되었는데 보면서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구요. 사상, 이념의 갈등에서 오는 무서움, 전쟁의 잔인함, 그로 인해 민간인들의 고통 등 전쟁을 겪으셨던 어른들께서 하셨던 말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었기에 그 잔혹함이 너무 무섭게 다가왔었으니까요.
저 동상의 주인공 형제들은 서로가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을까요? 그리고 형은 그렇게 두고 와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온 동생에게 얼마나 미안했을지, 동생은 자신과 가족을 그렇게 두고 떠난 형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그래도 만나서 형제가 함께 북으로 휩쓸려가지 않고 한팀으로 싸울 수 있어서 더 든든했을 것 같아요.
형제의 상 반대편 야외 전시장에는 각종 전투기와 탱크 등이 전시되어 있어요.
그 중에 2002년 월드컵 기간에 남침한 북한 해군 경비정의 기습으로 대응 공격한 참수리정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어요.
격전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총탄 자국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더라구요.
보면 얼마나 치열했을지 알 수 있죠.
고속정에 올라가볼 수 있던 것 같은데 관람시간이 꽉 차서 그러지는 못 했어요.
말하면 나이가 드러나는데 2000년 첫 월드컵 학번으로 이때는 대학 신입생이고 일본과 공동이긴해도 한국에서 하는 첫 월드컵으로 국가적으로 분위기가 들석이면서 들떠있었던 관계로 뉴스도 이 분위기에 묻혀서 당시에는 크게 뜨지 않았던 걸로 기억을 해요. 당시에 자취방에는 티비나 컴퓨터가 없었고 학교 식당 한켠의 티비나 학교 컴퓨터 랩실이 아니면 근처 PC방아니면 소식을 접할 방법이 없던 관계로 나중에 인지를 했었을거에요.
이때 정장이시던 이후 소령으로 추서된 윤영하대위 포함 6명 전사, 19명 부상에 고속정을 오는 중에 침몰했지만, 북한은 13명 전사, 25명 부상에 경비정은 반파되어 자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북한군 배에 예인되어 갔다니까 결과론적으로는 남한 승이죠. 근데 이후 부상자들과 가족 및 유족들이 억울하고 화가 나는 국가와 원수의 대응들로 좀 빡침이 있던 건 사실 아닌 사실인 거죠.
이대로 나온 것이 많이 아쉬움이 남았어요.
나오면서 그냥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바로 안가고 짐을 이고 지고해서 그냥 바로 왔으면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커다란 캐리어에 무게감이 있는 배낭에 카메라까지 들고 낑낑거리고 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힘이 빠지고 더 늦고 힘들어서 더 제대로 못 봤을 것 같아요.
전쟁관련해서 역사를 접하면서 지금은 휴전 중인 한국이긴 하지만, 지금도 어떤 지역은 내전 중이거나 다른 나라로 침공해서 전력으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적인 영향을 안받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시국에서 그래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한국 전쟁으로 외면해도 원망은 해도 욕을 못 할 상황에 명령이라고 해도 와서 목숨을 걸고 평화 수호를 위해 했던 이들 덕분에 숙연해졌던 날이었어요.
비록 한나라였던 곳이 두 나라로 나뉘게 되었지만, 이 나라와 평화를 지켜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이 평화는 거져 얻어지는 것은 아니였음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 개인적인 방문기입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곰팅이 같아도 감수성 풍부하고 여린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가시기 전에 꼭 부탁드려요.^^
'역마살 여자의 방랑기 > 걸어서 세계 속으로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여행/방문기] 딜쿠샤 -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 (0) | 2024.11.04 |
---|---|
[부산/역사] 부산 수정동 일본식 가옥/문화공간 수정 (구. 정란각) (0) | 2023.10.15 |
[부산해운대/숙소/리뷰] 부산 메르씨엘 호텔 (0) | 2023.10.15 |
[일상/여행] 부산에 다녀오다 (4) | 2023.10.12 |
[대구/당일치기] 빗속에서 걸어다닌 대구 근대문화 골목 방문기 (0) | 2023.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