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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문화마을에서 부랴부랴 UN기념공원을 두고 근방에 부산박물관과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도보로 약 20여분 거리에 있고 지하철역에서 30여분 정도 거리여서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로 판단해서 두 군데 다 가 볼 요량으로 향했습니다.

 

국립 일제강제동원 역사관이 평소에 잘 가보지 못할 곳이기도 하고 더 안쪽에 있어서 먼저 갔다가 나오는 길에 박물관에 들려서 보고 갈 계획으로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으로 향했어요.

 

역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라서 우리집에서 도보로 (내 걸음 기준) 35~40분 걸리는 울산대까지 걸어가는 걸 감안하면 능히 가능할 거리라 생각했는데…! 간과한 것이 있었어요.

대부분 길이 구시가지가 아니면 그닥 길이 복잡지 않고 반듯하고 대체로 언덕이 잘 없고 주로 평지에 이뤄진 울산과 달리 언덕이 많고 그런 언덕에 주거지나 시설들이 많고 길이 비탈지고 구불구불한 길이 많은 부산이란 것을…!

 

그냥 자가용가지고 가는 거 아니면 돈 안 아끼고 택시 타고 가거나 아님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것을 아주 강추예요.

 

 

약간 경사가 있는 길을 걸어가다 보니 네이버 지도와 달리 중간에 저렇게 가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그나마 여기가 가장 가깝네요.

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바로 앞에 역사관이 있어요.

 

 

1층 입구에서 체열과 방문자 기록을 하고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입장하면 바로 진입하게 되는 기억의 터널.

 

아주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면 나레이션과 함께 저렇게 영상이 재생되면서 조금은 밝아져요.

 

나레이션은 물론 함께 재생되는 저 영상을 보면 시작부터 마음에 비수가 한꺼번에 여러개가 날라와서 확 꽂히는 아픔과 묵직한 숙연함, 슬픔에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것 같아요.

 

 

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관해서는 명확한 통계가 없다고 해요.

일본이 정리한 통계자료와 연합군이 정리한 명부, 해방 이후 신고받거나 조사한 통계자료 등을 통해 짐작하고 추정하는 정도라고 하네요.

일본의 통계를 통해 그 규모를 추정하였는데 그마저도 작성과정에서 축소되거나 패전의 혼란으 오류의 발생, 소각,은닉 등의 가능성도 매우 높다고 합니다.

 

서대문 형무소도 일제가 패망하고 도망치듯 퇴거하면서 형무소 설계도, 죄수기록 등 관련 서류들을 서둘러 태우고 가버린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래도 남은 것이 있고 끊임없이 발굴하고 알아가고 찾아가고 있으니 그만큼 일제의 만행이 보여지는 것이겠죠.

 

 

강제동원된 군인들은 가족, 친지,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엽서는 군에 검열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강제동원되어 있는 곳도 생활고도 검열로 지워지는 경우가 많아 주로 안부 인사나 주고 받는 정도라고 하니까요.

 

 

한국에서도 류승완 감독 연출, 송중기, 소지섭 주연의 ⟬군함도⟧를 포함하여 일본이 유네스코에 등재 시도하면서 시끌시끌하게 만든 하시마 섬의 모형도 볼 수 있어요.

 

조선인에게는 '지옥섬'으로 불리는 하시마 섬.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지 항에서 약 18 Km에 위치한 섬으로 군함과 닮았다하여 한국어로는 군함도라고 불리기도 해요.

하시마 섬은 해저 탄광이 있어서 석탄도 풍부하고 그로 인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광업도시로, 카지노, 술집, 호텔,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번영을 이룬 곳이고 50~60년대 석탄업계가 침체되면서 서서히 몰락해 1974년 폐광되면서 현제 무인도로 남은 섬이에요.

 

그 이면에 강제 동원된 수백명의 조선인들이 비인간적인 환경과 처우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탄광 안이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고 수시로 유독가스가 분출, 작업도중 해수가 갱내로 들어오는 등 열악하고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채굴 작업에 동원되고, 먹고 자는 것조차 열악한데 가혹행위까지 더해지니 질병과 영양실조는 물론이고 도망가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도 이미 약해진 몸으로 익사하는 건 물론 겨우 벗어나서 육지로 갔다고 해도 행색을 봐도 조선인이고 하시마 섬을 벗어나봤자 일본이니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죠.

오죽하면 '지옥섬'이리고 했을까요…!

 

우리에겐 끔직하고 끔직한 강제징용의 아픈 상흔인 곳인데 일본은 근대화의 상징이라며 등재 추진하여서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가 되면서 지속적인 역사 왜곡을 시도하는 만행을 시도하고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이난 섬 조선군인자영대 명부

 

위 포로 배지는 김학이란 분이 1944년 2월 경에 콰잘린 섬에서 미군에게 체포되어 하와이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포로 번호와 사진이 담겨 있어서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지 않아도 포로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로 상대를 확인할 수 있게 해뒀네요….

 

 

조선인 포로 중 한명이었던 사람이 귀국선을 기다리면서 일제가 패망 후 연합군 지휘 관할 하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네덜란드 포로에게 배운 그림으로 수용소 시설과 경관을 그린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수용소의 시설이나 환경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스가모 형무소

스가모 형무소에 대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여긴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GHQ에 의해 접수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피고인들인 전쟁범죄자들이 수용되었으며, 판결 이후에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전범의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도 알려져 있어요.

 

전쟁이후 연합군은 국제전범재판을 통해 일제의 전쟁범죄를 단죄하기도 했어요.

이 국제 전범재판에서 조선인 148명도 실형에 처해졌는데, 그중 129명은 군무원 신분의 포로 감시원이었으며 이들은 일본군의 명령으로 연합군 포로를 강제노역시켰다고 합니다.

 

직접 포로를 상대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바로 연합군의 희생양이 되었고 일본은 가혹행위의 책임을 이들 개개인에게 전가했다지요.

 

전범으로 처벌된 조선인 중에 사형을 당한 조선인은 모두 23명이었으며, 그중 포로 감시원은 14명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시대에 출세하거나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로 일제에 아부하면서 그렇게 일할수도 있지만, 일제 강제징용으로 억지로 끌려와서 어쩔 수 없이 명령에 의해 강제로 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는데 그렇게 자신들이 강제로 끌고 와서 부릴 땐 언제고 패망하고 나니까 자기는 책임없고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면서 손절에 꼬리자르기하며 버리고 가버리는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참 씁쓸하네요.

 

 

51년에 시작한 한일 협정에 대한 아쉬움이 커요.

경제발전하는 재원을 마련하는데 급급해서 분명 피해가 있고 사과받을 기회가 있고 추후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을텐데도 그런 것을 간과하고 일본에게 일종에 스스로 면피할 계기, 꼬투리를 제공한 것 같아 속이 쓰린 면이 있지요….

 

물론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고 오래되지 않아서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어수선하고 폐허가 되어버린 땅에서 북한보다 가진 지하자원도 적고 오로지 인적 자원 밖에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던 경제적으로 일으키려는 금전적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불가분한 선택이었다고 하나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보상되지도 못 하고 더욱 대못만 박은 것은 아닌지…! 

 

 

거기에 일본 정, 재계는 물론 학자들이나 민간에서도 망언을 퍼부우면서 더욱 상처를 해집고 거기에 소금뿌리고 비벼댔으니…!

자기들이 식민 지배하기 편하려고 여기 개발하고 저기 파헤집어서 강탈해가고 그랬다는 걸 저렇게 포장해서 말하지…!

식민지배하는 입장에서 그 어떤 이득이 없는데 굳이 자국에서 무기들고 인력을 끌고와서 정복하지는 않는 것을…!! 그러고도 저렇게 망언들을 내뱉는지…!

 

 

일본은 끊임없는 야욕으로 침략전쟁을 일으켜서 여러 나라, 여러 민족들을 괴롭혔고 그 수가 수천만명을 혹가하는 이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아직도 그 상흔을 남겨두고 그 아픔과 고통이 이어져오고 있어요.

 

하지만 일본은 지금도 정부와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의 정치가, 학자 등이 그런 침략자체를 부정하고 외면하며 왜곡을 하며 근거없는 민족우월주위에 자신들이 세상 최고라고 고개 빳빳이 들고 있는 이들이죠.

 

하지만 일제시대에도 조선을, 한반도, 한민족을 궁휼히여기고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나라, 민족에게 배신자, 매국노, 불량선인, 조센징이라며 손사락질 당하고 사회적 지위며, 경제적인 이득, 명예 등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심지어 폭력에도 노출되며 안위에도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우리의 편에서 힘써 바른 소리하며 지키고 도와주려고 했던 이들도 있었으니 개인적으론 누구보다 감사하고 고마운 것 있어요.

 

사실 무한도전이란 한국 예능방송을 통해 알기 전까진 우토로 마을을 모르고 살았지요.

내가 아는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겪으신 일들을 한 세대 건너서 그 시기를 살짝 걸쳐 살아오셨던 부모님을 통해 듣거나 양화진 외국인 묘원 같은 곳에 찾아가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가고 알아가는 정도였으니 우토로 마을을 방송을 통해 접하고는 '아…!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도 징용, 징병으로 끌려가신 것만 아니지 만주와 일본에서 저 정도의 처우를 받으며 생활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날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당시 방송에 나오셨던 고(故) 강경남 할머니께서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셨냔 하하의 질문에 '사람이 살면 그곳이 바로 고향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고개가 숙여지고 아플 수 밖에요.

 

그때도 그곳에 사신 분들 외에도 우토로 마을을 알리고 힘써주는 이들이 있었으니 일본인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것처럼 지금도 일본 내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얼룩진 일본의 역사를 비추는 거울을 닦고 창을 여는 이들이 있고 남쪽 오키나와에서 북쪽의 훗가이도까지 일본 전역에서 강제동원 현장을 찾아내고, 유해발굴을 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 제기하고 바른 역사교육에 나서고 있기도 해요. 그래도 가리고 싶은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며 어떤 불이익, 위협이 있어도 할말은 하는 이들이 있는데 워낙 헤이트 스피치는 물론 극우들이 판을 치는 곳이라서 크게 힘을 발휘를 못 하고 있는 것 같 안타까운 것이 있지요.

 

 

5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가는 길에 있는 높은 벽 하나 가득 기증받은 사진들로 채워진 기증자·피해자의 공간.

저들도 누군가의 누이이자 딸이자 엄마였을 것이고 오빠이자 형이자 아빠이고 아들이었을텐데…!

 

 

강제동원의 과정이 여러 과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흔한 방법 두어가지가 양쪽 벽에 그림으로 말해주고 있었어요.

 

 

다코베야는 원래 죄수나 빚을 진 사람을 가두는 징벌방이래요.

초기에는 홋카이도 등 일부 지역에서, 탈출한 경력이 있거나 생산량이 부실한 조선인을 가두는 데 이용되었다고 해요.

 

직역하면 '문어방'을 뜻하는 다코베야는 어원에 대하여 여러의견이 있으나 공통되게 강한 통제를 의미하는데 와서 노역하게 된 조선인들을 감시 통제하는 최적을 찾은 거고 노예처럼 부리려고 데리고 오는 거라 숙소가 좋을리가 없고 처우가 좋을리가 없을테죠.

 

다코베야를 설명하는 안내문으로 있는 생존자의 증언을 보면 그걸 짐작케할 수 있지요.

 

 

조선인 노무자 숙소를 재현해 둔 곳에 들어가면 생존자들의 증언을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앉아서 볼 수 있게 해뒀어요.

 

사가현 소재 메이지 공업 다테야마 탄광에 강제동원되었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노무자 숙소는 자는 곳은 그냥 나무 바닥에 다다미 깔고, 사람 하나 설 만큼의 공간에 복도가 있고 사람들이 누울 공간이 양쪽으로 있었다고 해요.

 

한방에 당일 일 나갈 사람, 안나갈 사람이 있는데 일 갈 사람만 그날 밤 나오는게 규정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먹는 거라고 제대로 줬나 모르겠어요.

 

 

입구 근처에만 가도 곡갱이로 탄을 캐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탄광 입구.

 

많은 조선인들이 전쟁 물자인 석탄과 철광을 채굴하는 막장 현장에 투입되는데, 그 곳은 항상 막장의 천장이 무너져 매몰되거나 가스 폭발이 일어나는 등 각종사과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죠.

 

정말 섬이냐 육지냐의 차이지 앞서 말했던 광공업이 만연했던 군함도의 탄광과 같은 환경이었을 거에요.

 

 

아침 일찍 일어나 부실하기 그지 없는 식사를 하고는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저녁 7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일을 하는데 굴을 비우지 않고 3교대로 일을 한다고 해요.

그렇게 일하고 나오면 다친 곳이라도 없어야하는데 성하게 나온 사람이 몇 안되었다고 합니다.  다리가 잘리고 손이 잘리고 하다 못해 어디는 깨지고 다쳐서 나왔으니 부상자가 2/3는 되었다고 해요.

 

그렇게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도 모자라서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도 없이 나 몰라라 꼬리자르기라니…!

 

 

2차 대전이 커지면서 세계를 삼키고픈 야욕이 넘치는 일본은 중, 서부 태평양 전선으로도 우리 나라 많은 젊은이들을 끌고 가서 노역을 시켰는데 그렇게 부려먹으면서도 정작 조선인은 죽어도 상관없는 소모품인 것마냥 비행기가 지나가고 포가 떨여져도 자기들만 살겠다고 방공호에 들어가고 조선인들은 못 들어오게 막았다고 하더라구요.

조선인들은 얼마나 울분이 터지고 두려웠을까요…?

 

 

멀리서 부터 철조망과 가시철조망을 둘러져 있는 입구를 지나면 위안부를 넣고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위안소가 있어요.

 

 

철조망을 지나서 강제동원되어 위안부 피해자 중 한분이셨던 할머니의 증언 영상이 재생되는데 듣고 있다보면 같은 여성으로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 있어요.

 

대부분 할머니들이 비슷한 소원일텐데 제대로 된 보상도 보상이지만, 돈만 툭 주고 엣따~! 돈이다~! 가져가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정말 자신들이 한 행위, 자신들을 바닥 저밑으로 던져버리고 처참히 짓밟았던 그것들을 정말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그리고 그 사과를 뒤집어버리는 것이 아닌 정말 잘못했다는 사과 한마디면 된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올라올 만큼  너무나 큰 분노와 슬픔, 서글픔이 밀려왔어요.

 

그저 요즘 말로 복지도 좋고 페이도 괜찮은 일자리가 있다고 하니까 가족들 먹여살릴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속아서 갔던 것도 있지만, 자기들이 좀 뜯어 먹을 만한 것이 있는데 하는 것이 눈에 가시같이 구는 사람이 있는데 때마침 얼굴이 이쁘기도 하고 나이가 많지 않은 누이나 딸이 있네? 그럼 눈에 가시처럼 구는 사람을 압박하기 위해 꼬투리 잡고 유치장같은데 가두고는 그 집에 가서 니네 아버지, 오빠 남동생을 빼내고 싶으면 우리 따라 가서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어려운 것이 없다, 안갈거면 니네 아비, 오빠, 남동생 저대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죽는다고 협박하거나 평소 저 집에 여자 있다! 싶으면 밤에 자는 중에 쳐들어가서 끌고 간다던지 하는 등의 여러 방면으로 위안부로 끌고 가기 위해 위협과 협박과 회유와 눈속임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기에,  피해 할머니들이 원해서 위안부가 되었고 자발적 창녀였다는 일본 정부와 대다수의 일본 정치인, 극우 인사들이 하는 소리는 피해 할머니들을 두번 세번 죽이다 못 해 거의 부관참시에 영혼까지 소멸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중국인이나 아님 일본군의 주둔지나 점령지에서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온 사람들 중에 여성들을 골라 위안부로 농락하고 학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여성들이었고, 말이 위안소고 여성들을 데리고 와서 성적 학대를 행하는 것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 밖에 안되는 곳에서 대략 3, 4평은 될까 싶은 공간에서 일본군인들의 잔인하고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학대를 견뎌내야한다는 것인데  성병을 포함해서 병들고 더이상 상대하지 못 할 정도이거나 대들거나 도망치거나 등등 더 가학적으로 대하거나 아님 가차없이 비인간적으로 죽여 버리는 관계로 극한 공포와 스트레스로 자신의 언어를 잊어버리고 기억조차 사라져버릴 정도였으니 오죽할까요…!

 

 

어둡기만 했던 식민지 지배에 악마같이 맹위를 떨치던 일제가 패망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발걸음도 이어졌지요.

 

근데 그마저도 일본 해군수송선인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처럼 해방 직전 수많은 조선인들을 실은 배가 원인모를 이유로 폭발하여 수장시켜버리는 사건들도 있을 만큼 끝까지 악마같은 짓들을 자행하였고 한국에서는 일본이 계획적으로 한 일이다, 일본은 아니다! 미국 및 연합군에서 바다에 풀어놓은 지뢰같은 것들이 배가 지나가면서 건들여지게 되고 그러다가 터진거지 자기들이 한 것은 아니다! 하고 주장하며 싸우는 거죠.

 

그러고 보니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안전하게 일본에서 건너오시게 되었는지…!

배삯을 만드신다고 해방되고 한두달 있다가 이제 첫돌된 어머닐 안고 어린 자식들과 같이 오셨다는데, 희생자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정말 하늘이 도왔다는 말 밖에는 안나오는 일이에요.

 

 

얼마나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 분들이 가족이 보고 싶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셨을까요…!

얼마나 가족과 친지, 친구, 지인들이 보고 시폭 그리우셨을까요…?

 

전 어머니의 이종사촌이자 일본 이모할머니의 아들이신 숙부(제대로 호칭을 붙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예의 범절을 엄청 따지시는 아버지께서 아직 아무말 안하시는 걸 보면…!^^;;)께서 늦은 결혼을 하셨다고 외할머니를 시골에서 모셔와 있는 우리집에 인사하러 오신 걸 어리고 어렸던 내 기억에 있을 뿐 일본 이모 할머니는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께 들은 일본 이모 할머니는 참…! 강인하신 분이시고 한복에 머릴 쪽지고 일본인 사위/며느리는 절대 안보시고 자녀들이 일본인과 교제라도 하는 날엔 날벼락에 두드려 패서라도 갈라놓고 기여코 한국인을 사위/며느리로 맞이하시고 타이어공장을 하나 만들어서 온가족이 다 같이 일하고 일구셨다고 하실 정도로 강인하신데 한번씩 한국에 들어오시면 우리 어머니께 "자야~, 네가 해주는 된장찌개랑 시래기가 제~일 맛있다. 나는 그거면 된다. 어딜 가나 누가 해줘도 네가 해주는 것 만큼 맛있지 않더라~!"하시며 된장찌개랑 시래기를 맛있게 드셨다고 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못지 않은 무게의 묵직함과 서글픔을 안고 1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나오니 안내데스크에 있던 직원분이 잘 봤냐고 어땠냐며 물어보더라구요.

몇마디 주고 받고는 포장된 작은 상자 하나를 주시길래 감사히 받고 나왔어요.

 

 

가는 길에 풀어 보니 텀블러네요.

잘 쓰도록 할게요.

 

 

밖으로 나오니 벌써 5시가 지나서 박물관까지는 가기 힘들 것 같아서 포기하고 도저히 걸어갈 자신도 없어서 택시도 없는 곳에 마을 버스가 몇 분 안있다가 온다고 하기에 기다렸어요.

 

근처 UN기념 공원과 묘원이 있다보니 관람하러 들어가기 전에 묵념시간이었는지 나직한 나팔 소리가 들리길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러려니했는데 바로 옆에 유엔평화기념관이 있었네요.

이왕이면 근처 박물관도 있으니 시간을 넉넉히 잡고 박물관까지 잡고 근처에 있으니 유엔평화기념관과 국립 일제강제징용기념관을 함께 둘러 보고 가면 좋겠어요.

 

전 시간이 되면 들어갈까…?했는데 나오고 보니 시간도 40~50분 정도 밖에 안남았고 이미 많이 지쳐서 더 늦기 전에 돌아갈 생각에 다음을 기약했어요.

 

덕분에 박물관은 못 가고 이만 당일치기 부산 여행은 마무리하고 일제의 만행에 끝없는 서글픔을 가슴에 담고는 돌아왔습니다.

 

정말 어두운 역사도 자신의 역사고, 아픈 역사도 자신을 있게 하는 역사인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거에요.

 

 

 

 

 

 

 

☆ 개인적인 방문기입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곰팅이 같아도 감수성 풍부하고 여린 제게 아주 큰 힘이 됩니다.

가시기 전에 꼭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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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3일. 이날 계획상 그동안 가보고 싶었으나 못 가보거나 근처에 관심이 가는 곳들로 4군데를 다 돌아볼 계획인지라 일정이 빡빡했다.
그래도 부산 근대 박물관처럼 가고 싶어도 자체적으로 못 가보면서 자연스럽게 근처에 다른 곳도 건너뛰게 되어버리는 곳도 있지만, 임시수도기념관이랑 감천마을, 박물관, 일제 강제 동원 역사관으로 가려고 하면 오늘은 아무리 거리를 최대한 줄이려고 했다지만 바빴다.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 홈페이지 : museum.busan.go.kr/monument
- 관람시간/관람료


제일 먼저 임시수도기념관을 먼저 들렸다.
임시수도기념관이 1시간 단위로 5명으로 적어도 전날까지 예약이 되는데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당일날에도 입장이 가능했다.

난 혹시나 해서 이날 11시에 예약을 했던 관계로 집에서 부랴부랴 달리고 달렸는데 지하철 토성역에서 나오니까 10여분밖에 안 남아서 UT나 카카오 택시가 아니면 기본요금 내고 갈 거리라서 때마침 승객이 내린 택시 잡아 타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그러니 걸어서 약 7분? 대략 넉넉잡아서 10여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낯선 지역인지라 헤맬까 봐 택시 타고 3분도 안되어서 입구에 도착했다.

 


그냥 걸어서 왔다면 걸어 올라왔어야 했던 계단에 피난민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상이 서 있었는데 가슴 짠한 역사의 한 모습이다.

 


입구에서 방문자 수기로 기록하고 열체크 후 들어갔을 때 보이는 대통령 관저.

일제시대에 경상남도 도지사의 관사로 지어진 2층 목조건물로 전쟁 중에는 피난민들은 물론 대통령 및 관료들까지 모두 내려오면서 부산이 임시수도로서의 역활을 수행할 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건축되어서 그런가?
대구 서문 시장 맞은편에 계명대 동산병원 뒤편으로 청라언덕 근처에 있던 외국 선교사님들 사택 3군데와 규모는 달라도 비슷한 느낌적인 느낌.

그곳도 여기 이 건물과 같이 근대 건축물로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으니까.

 


현관 위에 있는 한자가 적힌 현판이 있는데 저 필체가 누구의 필체일까?
생각 사와 집 당은 알아봤는데 가운데 있는 한자는 못 알아보겠네.^^;;
당시엔 생각 사와 집 당까지는 알아봤는데  중간에 알아보지 못 한 글자는 나중에 후기를 작성하려고 찾아보니 나라 이름 빈이라고 한다.

 

근데… 내가 한자를 한의사인 오빠나 교대 국어교육 전공한 동생보다 모른다고 하지만 이럴 만큼 못 알아보지는 않을 텐데 이만큼 못 알아보나…! 해서 당황했었네.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한 뒤, 정화작업을 거쳐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개관할 때 대통령 관저의 당호라고 한다.
개관에 즈음하여 역사학자 정중환 선생이 지은 당호를 독립운동가 한형석 선생의 글씨로 현판을 새겨 걸었다.

 


현관으로 들어가서 화장실을 지나 응접실로 가면 이렇게 모형으로 만들어 놨다.
보면 신기한데 난 구석구석 가보고 싶은 욕구가…!!^^

 


난 난방만 잘 되어 있다면 이런 구조의 집도 정말 좋다.
햇볕도 잘 들어오고 이렇게 'ㄱ'로 창문이 있는 것도 재미있기도 하고 분위기도 좋다.^^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은 가족들을 위한 공간인 거실과 달리 손님들을 응대하기 위한 공간이기도 해서 적절히 잘 꾸며진 공간이라 집 안에 있는 작업실? 업무실?? 같은 느낌이다.^^
당시 서양문화에 대한 동경심이 강한 일본의 성향에 외국 선교사나 서양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와서 건물을 짓던 시기이기도 해서 그런지 근대 건물이 서양식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이 알수있는 게 금이 가서인지 비가 샌 흔적인지 보수하던 흔적이 선처럼 보인다.


응접실 옆에 있는 서재.
이승만 대통령의 모형을 만들어서 당시의 모습으로 만들어 놨는데 지위와 권력, 인정받고 대접받는 것에 대한 욕심만 안 부리고 학생들을 주축으로 일어나 데모로 하야하는 것처럼 마무리만 나쁘지만 않았으면 그래도 후세의 평판은 좀 괜찮았을까…?
그래도 더 이상의 희생은 없도록 그 정도에서 하야하고 물러나서 다행이지.

 


서재를 지나 보면 이승만 대통령과 프렌체스카 여사가 사용했을 내실.
당시의 모습으로 재연하여두었는데 소박함이 묻어나는 것 같다.
응접실 외에 전등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저 시기에는 저것도 최신식이겠지.
저것도 멋있는 것 같은데 그닥 전등이 밝지는 않은 것 같다.

 


사진은 없는데 모형이 있는 거실 지나서 있는 다이닝, 식당의 모습.

대통령 내외와 직원들이 사용했던 공간이라고 하는데 부엌 옆에 식당이란 칸이 더 있긴 하지만 여기가 더 눈이 가고 더 다이닝 같은 공간이다.

여기를 거실로 써도 상관없을 면적인데 부엌 옆에 있는 공간이니 다이닝 공간으로 사용해도 나쁘지 않을 공간인 것 같았다.

옆에 있는 다른 식당 공간과 지금 보이지 않지만 지금 서있는 입구 옆에 있는 벽 쪽에 그릇장이 있어서 당시 사용했을 그릇들을 장식되어 있다.

 


근데 내가 한 번씩 듣는 소린데 정말 옛날 것에 관심 많고 앤틱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직한 분위기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빈티지 같은 저런 분위기의 가구나 그릇 같은 것이 왜 그리 좋은지~.^^
잠시 취향 저격하고 지나간다.

 


도면 같은 안내문엔 여기도 식당이라고 하는데 재연해둔 걸 보면 꼭 광같아요.^^;;
쌀뒤주도 있고 놋그릇 정리해둔 그릇장도 있는 걸 보면 그래 보이는 식당이네요.^^;

 


식당 두 칸을 지나서 보이는 부엌.
또다시 다이닝 룸에 이어서 상부장이랑 환풍기가 없다는 것과 수전만 빼고는 완전 제 취향 저격해버린 부엌 구성에 취향 저격당한 나…! ☆*: .。. o(≧▽≦)o .。.:*☆
근대적인 주거 양식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건물 건설 당시의 보편적이고 최신 설계로 만들어진 거라 당시의 건축 양식과 주거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자료인 것 같았다.
대구 서문시장 맞은편에 계대 동산병원 뒤쪽으로 청라언덕에 보면 의료 박물관으로 쓰이는 것 같이 외국 선교사님 사택으로 쓰였던 근현대사 사적으로 문화재 지정된 건물들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보는 것 같다.^^

 


부엌 맞은편에 생각의 방으로 꾸며진 조리사 방은 한두 명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크기여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면 적당한 크기였다.
붙박이 장 앞에 고풍적인 의자가 놓여 있고 앞에 그런 분위기의 벽장에 부산 역사와 여러 관련 책자들이 있어서 편히 앉아서 볼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옆에 원래 경비실로 사용된 곳에 마련된 증언의 방으로 향했는데 거기는 한국전쟁 당시 특공대원으로 참가했던 이정숙 할머니의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어서 할머니의 모형과 당시 사용되었을 옷과 신발, 철모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네킹으로 재연해둔 이정숙 할머니의 모습은 들려지는 목소리와 함께 강단 있고 은근한 카리스마가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기세 좋고 기상이 높은 장군의 염원이 여성의 몸에 깃든 것만 같은 기운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과 욕실을 패스하고 증언의 방에서 나와서 바로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는데 1층 현관에서 바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서 어느 방향으로 올라가도 상관없다.
근데… 양쪽 다 가파르다 보니 조심해야 하는 면이 있다.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집무실는 이승만 대통령이 개인 업무를 보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관저의 살림살이를 보던 공간이라고 한다.

1층처럼 당시의 모습으로 재연을 해두었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었는데 2008년에는 전시장을 설치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과 당시 자료들을 전시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하고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저렇게 현수막처럼 연표와 변천사 같은 것들이 적힌 것들이 걸려 있다.

 


일식과 서양 근대 건축 기술이 접목되어서 그런지 그런 양식이 잘 보이는 대통령 관저인데 1층도 그렇지만 2층이 더 그런 것이 잘 보이는 것 같다.
마루 바닥이며 실내 구조를 보면 일식 건축양식이 보이고 대다수의 입식 생활문화가 들어오고 외관의 건축모양은 서양식인데 유난히 2층은 일본의 고택 주거 양식에서 볼만한 일식 실내 구조가 보이는 것 같아요.

 


집무실 옆에는 임시수도 관련 영상물을 보여주는 회상의 방이 있다.
관저에 방문한 손님이 쓰던 마루방이었는데 일종의 게스트룸? 그런 거 같다.
이날 하루에 가볼 곳들이 있고 대체로 운영시간이 제한된 곳들이라서 얼른 가봐야 하다 보니 느긋하게 음성이나 영상, 책을 볼 여력이 안되어서 결국 보지 못 하고 그냥 돌아 나와야 했다.
하지만 2층으로 올라갔던 계단 말고 현관 옆에 있는 직선 계단으로 내려갔는데 그곳 직원분 말처럼 옛날 건물이라서 계단이 상당히 가파르기도 하고 좁은 것도 있어서 잡을 난간 같은 것이 없기도 하다 보니 내려가는데 엄청 긴장했네….^^;;;

 


관장실을 지나 뒤쪽에 있는 전시관을 향하는 길에 본 길고양이.
어찌나 쌀쌀맞은지….^^;;

 


대통령 관저 뒤에 위치한 현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1987년 9월에 개원한 부산 고등검찰청의 검사장 관사 용도로 지어진 단층의 벽돌조 가옥이다.
현재 전시 흔적을 없애고 봐도 세련된 느낌이 있다.

또한 이후 검찰청사의 이전에 따라 2002년 임시수도기념관 영상관으로 개편되었다가 전면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2012년 9월 19일자로 한국전쟁기 임시수도로서 국난을 극복해낸 부산의 위상과 역사성에 대한 내용을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 관저만큼이나 호기심이 들어서 바로 갔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한 칸을 재현해두고 거기에 부산이 임시 수도로 역할을 하게 되고 재건하기 위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어서 보고 느끼게 되는 무언가가 있게 되는 것 같다.

 


야쌉하게 허를 찌르며 공격하는 광기 어린 북한군의 기세에 맥없이 부산까지 밀려왔다가 다시 중국이 있는 국경 근처까지 밀고 올라가고, 또다시 중공군의 합류로 서울로 환도했던 정부가 부산으로 돌아와야 했던 걸 생각하면 뼈 아픈 역사의 흔적이 보존되어 보여지고 있다.

 


전쟁 이후 재건 시기에는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이었기에 일자리를 찾는 이들은 장사를 하기도 하고 막노동도 하기도 하겠지만, 그러기 전에는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처자식,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정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구직(求職)'이란 팻말을 목에 걸고 일자리를 찾아다닌 걸 그 시기를 거쳐오신 어른들의 말씀들을 들어 알고 있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던 것 같다.

 


피난민들이 쓰던 물건들과 구호물자들도 전시되어 있다.
늦둥이 오브 늦둥이인 내가 어릴 적 옛날 옛적의 영화가 TV에서 할 때 미군  혹은 유엔군이 구호 물품을 나눠주는 장면에서 저럴 때도 있었다며 더 타고 싶어도 한정되어 있었고 미군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연줄이 있어서 한 줌이라도 더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저마저도 없어서 못 받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었다.

 

 

국제시장에서 보면 피난 온 주인공 가족이 부산 고모집에 왔을 때 봤던 그 토굴 방 같은 판자촌 집이 재연되어 있다.

안에도 그렇게 살았을 법한 모습으로 재현해두었는데 부모님께서 부산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었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사시고 살림 이루셨지만 그래도… 이런 판잣집에서 그렇게까지 고생하셨다면 엄청 맘 아팠을 것 같다…!

 

 

학교종, 학교 문을 재현해둔 걸 보면 친근함이 묻어난다.

언제나 부모님의 자식들을 공부시키시려는 열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 전쟁통에서도 천막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 보면…!

민족적인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다.

 

최대한 밝기 조절해서 사진이 흔들리는 것이 없게 하려고 했는데 정말 이럴땐 힘드네 …!

 

한국전쟁 때문에 당시 반공 독본이 있는 것을 보면 그럴 만도 하지 싶고 당시 쓰였던 교과서며 잉크병 주판도 신기하다.

당시 쓰이던 것들을 보면 저 당시에 어떤 학용품(?)을 쓰고 어떤 교과서를 쓰고 소설책이 있는지 보는 것도 알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다방 [밀다원]을 재현해도 곳을 볼 수 있어요.

한쪽에는 당시 문화제나 연극 등의 팸플릿이나 부산 사범학교 졸업장 같은 것이 전시된 것도 볼 수 있다.

 

 

 

 

 

 

 

서양에서던 한국에서던 다방은 지식인들과 문인들의 방문이 잦고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뤄졌다는 것을 알고 그만큼 문학적인, 지식적인 교류가 이뤄졌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근데… 정말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 거지만 진짜 이런 가구나 그릇이 정말 좋다. (●'◡'●)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고 부산 한 곳에서 있었던 임시 수도 시절과 경제적, 사회적 발전상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근현대적인 건물도 겸사겸사 볼 수 있음에 감사했고, 이런 어려움, 고난을 겪었음에도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뤄내신 어르신들의 수고와 노력에 감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개인적인 방문기입니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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