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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 여자의 방랑기/걸어서 세계 속으로 1

2016년 8월 15일 역사적인 날 서대문 형무소 역사 기념관에 재 방문하다.

by Esther♡ 2019.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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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2. 18.에 작성한 방문기 §

 

 

 

전날 애정하는 배우의 공연보러 올라갔던 건 비밀로 하고 싶지만, 올라간 김에 다음날 공휴일이고 역사적인 날이기에 뭐에 이끌렸는지 처음 방문했을 때, 해설사분께서 무척이나 잘 이끌고 열심히 해주셨느데도, 완전 훈련 안된 비글들을 풀어놓은 것 같은 아이들의 훼방 아닌 훼방으로 제대로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던 것으로 기억해서 재차 방문하기로 했는데 광복절을 포함한 전후로 행사한다는 것과 사람이 많을 거란 걸...^^;;; 간과하고 갔더니 줄이...!!

비좁고 사람들이 많기는 그때보다 더 많아서 혼잡하기는 그지 없어서 무척 당황했었네요...!^^

 

 

 

근 30여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들어갔었죠.^^;; 더운날 탈진할까 겁먹을 정도였어요...!^^;;

 

 

 

 

일본이 패망하면서 모든 서류들, 흔적들을 태우고 지운 뒤에 떠났지만, 그럼에도 당시 건축설계나 서류들이 소각되지 않고 행여 남겨진 것들이 있어서 저렇게 복원이 되었다고 해요.

나중에 메모리얼 공간에 있는 수형기록표도 꾸준히 복원하고 있어서 복원되는대로 이름순으로 정리될거라고 처음 방문했을 때 설명들었어요.^^

 

 

 

 

 

 

 

당시엔 지금보다는 못 한 거라도 총 자체가 귀하고 지금보다 더 비쌌던 시기였기에 의병이나 독립군으로 활동하셨던 분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던 칼인데 대놓고 나 칼이요~!하는 걸 들고 다닐 수 없으니 대부분 평소에 지닐 수 있는 물건에 언제든 칼을 뽑아 쓸 수 있도록 위장하여 들고 다녔다고 하네요.

 

 

 

 

수감되게 되면 저렇게 세세히 기록하고 지문도 열손가락 다 찍어두어 자료로 남겨두고 언제던지 도망치든 다시 수감되든 할 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도록 했다네요. 지독한...!

 

 

 

 

이제명 의사는 스무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의거를 결심하고 준비하여 이완용을 처단하려했으나 이완용은 용케 몇군데 칼에 찔린 채 몇년만 늦었어도 죽었다고 할만큼 위험한 상황에서 현 서울대 병원이었던 경성제국대 병원에서 정형외과 수술을 받아서 살아났지만 이때 다친 폐로 인해 죽는 순간까지 천식으로 괴롭고 편치 않고 골골거리며 살았고, 이완용을 보호하고자 그를 막았던 인력거 인부가 사망하게 되어 그 사람의 사망을 근거로 사람을 죽였다고 사형이 언도되어 항소, 항고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돌아가셨다네요.

 

그때 마지막으로 할 말있냐는 재판부의 말에 일본이 망할 때까지 수천, 수만명의 이재명으로 태어나서 끝까지 싸울거란 말을 남기고 순국하셨는데, 사실 눈물나게 감사한 일이고 저도 그런 상황과 시국에서 당장 죽을 수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댓가도 없다고 해도, 심지어 두렵고 공포스러워도 불합리한 압제에다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거를 하고 그렇게 말을 할 수 있고 시원히 죽이겠다면 죽여라하는 담대함이 있을 수 있었으면 하네요. 그럴 만큼 먹먹한 감이 있어요.   


 

 

 

김원봉 선생이 단장으로 있으셨던 의열단과 의친왕.

사상적인 것과 시대상황상 직위에 의해 말들이 생길 수 있지만,  그들은 사상과 직위를 떠나 이미 망한 나라의 왕조와 민족이여도 자신의 민족,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몇 될까요...?

 

여기가 제가 작년에 처음 방문할 때 목이 엄청 메이기 시작했던 곳들이네요. 많이 알려진 안창호 선생이나 유관순 열사나 만해 한용운 시인을 ​포함한 이곳에 당시 수감되었던 여러 분들의 수형기록표들이 있어요.

 

이름 순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중간에 비어 있고 아직도 빈칸이 좀 남아 있는 것은 아직 얼마나 이 곳에서 수감되고 죽어가거나 풀려났는지 파악이 안되었는데다가 일본이 패망하여 돌아가기 전에 태워버리고 간 것을 꾸준히 찾고 발굴하고 있는 중이라 찾는대로 이름 순으로 채워넣다보니 중간중간 빈칸이 남아있고 여전히 뒤에 빈자리들이 남아 있는 거라고 하네요.

 

 

 

여기서부터 작년에 해설사분께 들었던 것을 의문점을 내뱉는 방문객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던 것 같네...!ㅜㅜ

이 못 말리는 오지랖...!ㅜㅜ

 

 

 

 

경성 트로이카는 1928년 11월에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33년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주축이 되어 학생, 노동자, 농민들을 규합하여 서울, 경기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활동으로 와해되고 이재유의 지도로 이름만 바꿔서 활동을 지속하지만 이 역시도 이재명이 체포되면서 계속 이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청주 형무소로 이감이 된 뒤, 44년에 옥사로 순국하셨다네요.

 

 

일본인이라고 다들 한국을 집어삼키고 괴롭히려고만 하지 않았어요.

이분은 이재유의 대학 스승이자 경성대의 교수로 있었고 공산주의이셨던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이세요. 제자인 이재유가 독립운동했다가 잡혀서는 용케 탈출하자 자기 집 마루 밑에 숨겨두어서 어찌 알고 온 일경에게 끌려가서 그의 행방을 불라는 모진 고문에 하루 24시간의 시간을 달라고 해서 일경들이 그의 집에서 물러난 뒤 충분히 이재유가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집에서 나와 달아날 수 있도록 한 뒤 24시간 뒤에 다시 찾아와 자신을 고아대는 일경에게 그제서야 자신의 집에 숨겨두었다고 불으니까 헉~!한 일경이 허겁지겁 관사를 덥쳐서 뒤졌지만 이미 이제유는 유유히 사라진 뒤이고 있는대로 열받은 일경은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를 있는대로 폭행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시켰다고 합니다.  이 일로 바로 교수자리에서 잘리고 사모님이 중고 책방하면서 옥바라지 하고 훗날 해방이 되어 일본에 돌아갔을 때에야 대학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 만큼 사회적인 제약을 엄청 받으셨죠...!^^;;

 

 

 

 

 

 

 

이어서 지하 고문실과 독방으로 향했죠.

 

이날 유독 가족 단위로 많이 방문했었는데, 학부모님 중에 간혹 부모 말 안들으면 이런 일 당한다, 여기에 와서 저기(감방)에 들어가서 생활해야한다고 그러니 말 잘들으라는 식으로 아이에게 협박(?)을 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시던데 별로 보기 좋지는 않더군요...!ㅡ.ㅡ^

'얼마나 말 안들음...!'하는 생각이 들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훈계를 한다고 해도 그런식으로 협박은 해서는 안된다고 배웠고, 저도 역시 아이들을 상대할 때 협박은 먹히지 않고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속에선 불이 나도 인내하면서 좋게 타일렀을 때 더 잘 먹혔다는 걸 봤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인상이 찌푸려지고 그 말을 하는 학부모가 누군지 확인했을 때 화가 나고 아이가 아무렇지 않은듯이 행동해도 시무룩하고 기죽은 것이 보여서 속상하더군요.

제발... 아이들을 지도할 때 그런 협박은 안하셨으면 해요. 그런 협박이 나오는 순간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도 그런식으로 부모에게 교육받았다고 광고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그런 협박 안통해요...!ㅜㅜ

자 잔소리는 여기서 그만하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지하 고문실이 있는 곳이에요. 재방문인데도 서대문 형무소 중에 제일 몸서리치는 곳 3군데를 고르라면 이곳 지하 고문실, 독방인 먹방, 사형장일 만큼 이곳은 진짜 몸서리쳐지네요...ㅜㅜ

 

오자마자 보이는 곳이 물고문 재현한 곳이네요. 부들부들...!!

 

 

잡혀와서 심문 전에 임시 구금실에서 이렇게 대기하게 하는데...!

 

 

 

이렇게 바로 옆 취조실에서 취조하고(얌전히 취조할 일경이 아니죠...!^^::)!

 

 

 

고문실에서 잡혀온 이들의 고통스런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퍼지는데 공포가 이런 공포가 또 없을 만큼 심리적인 압박이 심할 수 밖에 없죠. 일본도 그걸 노린 거였구요...!ㅡ_ㅡ;;

​그렇게 고문했던 것도 독립운동과 저항이 수그러들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꺽어보겠다고 그렇게 모질게 자기 나라 사람까지도 잡아다 넣고 심지어 외교적인 비하로 번질 수 있는 외국인들도 여차하면 잡아 넣었다고 하더군요. 이 사실은 뒤늦게 제 아버질 도와주셨던 미국 선교사님에 대해 알고자 하다가 연이 닿으셨던 분께서 그 선교사님의 장인께서 일제시대 활동하셨던 선교와 역사를 알면 알만한 선교사님이신데 한국을 위해 아닌 건 아니라고 일본에 항거하고 극렬히 저항하다가 옥고를 치르셨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알게 되었어요.

 

 

 

고문상자와 벽관이란 고문장치에요.

광복절이라는 무게가 있어서 그런가요? 작년처럼 그렇게 비글같이 제어안되고 악마처럼 날뛰며 놀이터 마냥 장난치는 아이들 무리가 없어서 감사했어요.

대체로 가족단위 방문객이다 보니 자기 아인 각자 부모들이 제어를 하시니까 더 그랬나 봐요.

 

 

 

고문하고 심문하다가 여차하면 언제든 다시 심문할 수 있게 저렇게 성인 한명이 겨우 누울 공간에 배변​할 수 있는 나무양동이? 통 하나 넣어주고는 집어넣어서 역시 고문과 심문 소리에 심리전에 휘말리도록 만들어놨더군요. 구조 상 진짜 절묘했어요.

지상으로 올라와 보안과를 재현해둔 곳에 들어갔네요.

 

 

 

마네킹인데도 참 얄밉네요...!^^;;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포함한 여러 이들의 옥중 일기와 서신들도 전시되어 있어요.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는 작년 해설사님께서도 설명하시면서도 읽으시면서도 고생하셨는지 정본? 그걸 다짜고짜 보시려고 한다면 어려워서 얼마 못 가고 손 놔버릴 거라면서 아이들 수준의 만화를 먼저 시작해서 차츰차츰 글자가 많은 순으로 보시는 것이 좋다고 권하실 정도였는데 참 말안듣기로 유명한 전 8월이 오기 몇개월 전에 읽을거라고 사놓고도 아직 손도 안대었네요.^^;;

 

애국지사 김규만의 옥중 일기. 아래와 같이 시도 적혀 있어서  일부 발췌해서 옆에 가지런히 같이 두어 전시하고 있기도 해요.

 

 

 

 

당시 세계를 다 집어삼킬 야욕에 일상이 전쟁이고 수탈이던 일본이었기에 수형자들에게도 옳게 밥을 줬을리는 없고 영양적으로 균형을 맞춘다고 넣었다지만 조나 보리를 포함한 쌀알보다 콩이 더 많이 있었고 자기들 기준에 독립운동하다 잡혀오는 등의 악질이거나 말을 지독히도 안듣는 수형자일수록 저런걸 바닥에 깔고 밥을 되어서 줬다네요. 거긴 항상 몸이 축나고 상하고 배고픈 곳이기에 먹는 것까지도 장난을 치고 괴롭히는데 썼다니까...! 할 말을 잃어버리죠...!

 

수형자들을 하는 일없이 고문만하고 괴롭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저렇게 휴식도 없이 계절에 따라 시간에 맞춰서 밤늦게까지 휴식도 안줄 때도 많고 식사 시간도 달랑 30분, 먹을 거라도 잘 챙겨주는 것도 아니면서도 노역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시키...!

 

분명 두번째 방문인데도... 또 발끈...!하게 되니...!ㅜㅜ

 

 

 

수형복이라네요.

기결수, 미결수로 나누고 대기자들과 대기자 아닌 사람, 환자들은 수형복 색깔로 구분했다고 해요.

겨울에는 솜으로 누빈 ​수인복도 영치되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물자가 귀하면...! 하는 생각이 들면서...!ㅜㅜ

 

 

 

중앙 간수소 옆엔 수형자들이 밖으로 서신을 보낼 때마저도 무슨 일 생기면 색출하기 용이하도록 감시하게끔 서신실이 저렇게 되어 있더군요.

전에는 쇠창살이 잠겨 있던 문이 열려 있어 그곳으로 들어갔더니 여기와 비슷하게 지어진 여순 감옥과 관련된​ 전시회가 이뤄지고 있더라구요.

​들어가서 보는데... 여긴 고시원보다도 작을 것 같은 독방같은데...!!

 

여기에 3배는 될 법한 감방에는 첨엔 5,6명 넣다가 독립운동이며 뭐며 워낙 잡아들인 이들이 많아서 4, 50명을 한꺼번에 집어 넣어서 자는 것도 편하게 누어서 잘 수 없어서 무슨 불침번 서듯 돌아가면서 ​잤을 정도였다는데 여기는...! 과연 몇명이나 들어갔을까요...??ㅜㅜ

 

제가 갔을 땐 광복절이라서 그런지 중국 북동부 지역에 위치한 뤼순 감옥에 관련된 전신물들과 안내들을 전시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어요.

 

 

 

 

 

 

 

 

 

일제 치하에 식민지 중에 죄수를 가두던 형무소/감옥 중에 제일 독하고 잔인하기로 따지면 중국에는 뤼순 감옥, 한반도에는 서대문 형무소인데 비슷한 수준의 잔인함과 지독함인데, 그나마 1등을 꼽으라면 뤼순이라고 해요. 중국에서 북쪽에 있는데다가 처우나 고문, 취조 등이 너무나 열악하고 잔인하다고 하는군요.

 

 

 

 

 

 

 

 

저 천정에 있는 채광창 덕분에 마음이 엄청 미어지도록 구슬프게 실내가 밝네요...!

 

 

밥 찍어내는 틀을 보니까 여순형무소에도 서대문 형무소에서처럼 고문에 괴롭힘으로 더해서 못 살게 구는 것만 아니라 먹는 것까지도 못 살게 괴롭혔나 보네요...​!

 

 

돌아와서 보면 한쪽엔 여기에 수감되셨던 독립운동가나 민주화 운동을 하셨던 분들 연혁과 사진, 발도장도 같이 전시 되어 있기도 하는데요...!

 

 

 

 

이분은... 시인이시자 역시 독립운동가이셨던 이육사의 사촌 누이이시자 본인 역시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 도우셨던 이병희 지사이세요.

그 때 당시 보기 드믈게 동덕 여자 보통학교(현, 동덕여고)를 나오셨을 정도로 학문을 어느 정도 익히신 분이지만, 독립운동 명문가에서 독립운동가가 나오는 것처럼 당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부친 이경식의 영향으로 공장 여공으로 들어가고 의열단에 가입해서 노동운동이며 독립운동이며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셨네요.

 

북경에 망명온 사촌오빠 이육사와 독립운동을 협의하다 걸려서 북경수감소에 수감되었고, 1944년 1월 결혼을 조건으로 석방이 되었으나 이육사는 이병희 지사가 출소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건강 악화로 옥사하심으로 순국하셨는데, 일제가 어떻게든 유품이든 시신이든 훼손할까 봐 그 시신과 유품을 다 수습하셔서 시신은 화장하여 맞선보러 가면서도 꼭 안고 다니며 국내 가족들에게 전달하셨다고 해요.

그러기에 우리가 많이 알고 국어 교과서에도 오르는 "청포도", "광야" 등 그의 작품을 지금까지도 접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저렇게 곱고 앳된 처녀애가... 어떻게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는지...!

"고문당하는 거, 그게 무서웠으면​ 독립운동 못 하지." 하시는 이병희 지사님의 말 한마디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꼭 독립해야하고 그것도 중요한 만큼 독립운동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하면서 잡히지 않을까, 고문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깐이나마 무섭고 두렵지 않았을까 했던 제 짧은 생각을 여전히 부끄럽게 만드네요...! 


다음은 12옥사 먹방인데 얼마나 작고 어두운지 함 보실래요?

 

 

 

두번째는 먹방 자체가 너무 어두워서 도저히 카메라로는 내부의 모습을 담아낼 수 없어서 스마트 폰에 있는 카메라로 담아 냈었네요.


여긴 독방으로 한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약 2.4(0.7평)로 여긴 24시간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서 마치 먹물처럼 깜깜하다하여 ​일명 먹방이라고 부르는데 각자 다르겠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주거면적이 못 해도 약 14㎡( 4.2평)에 화장실 등 생활에 필요한 공간을 추가하면 약18㎡( 6평)정도가 필요한데 거기보다 적으면 패쇄공포증 등 정신건강에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친다고 어디서 본 기억이 있네요.

 

거기에 사람에게 햇빛이든 무슨 빛이든 빛이 얼마나 중요한데 빛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사람이 미치는 건 한순간인데 저렇게 빛도 안들게 만들어놓고 용변도 저 끝에 보이는 구멍을 통해서 하다보니 철저하게 사람들과 격리되기까지해서 여기에 들어간 사람들은 오래 못가서 정신착란, 공황장애같은 정신적 질병을 겪는 등 상상 이상의 고통이 뒤따랐고,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항일 운동하고 이미 지도에서 없어진 나라를 되찾겠다고 난리치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더욱 독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로 억압했었지만 특히 독립 운동가들은 특수 범죄자로 분류하여 변기도 없고 햇빛조차 없는 이 독방에 투옥시켜 모진 폭행과 고문을 하는등 갖은 악행을 일삼았다고 하니...!!!


​멍...!하게 나오면서 어두컴컴한 먹방을 보다가 갑자기 복도의 밝은 빛에 위를 보다가 눈에 똭...!!!

 

 

 

흠칫...!!!(깜짝...! 으르렁~~!!)

 

 

 

 

 

 

 

 

 

 

작년에 왔을 때, 수형자들이 들어와서 있었던 날들을 표기 해가던 표시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저런 숫자들을 보니 극한의 무언가로 인해 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저번에 왔을 때는 저렇게 마네킹이 하나 밖에 없었고 설명판이 있었나 싶었네요.

타벽통보법이라 해서 다른 방에 있는 수형자들끼리 말 할 수 없겠금 되어 있으니 벽을 딱딱 두드려서 약속된 암호로 대화하던 방식을 취했다네요. 마당에 부채꼴 모양으로 된 격벽장도 최소한의 햇볕을 쬘 수 있게 만들어둔 곳도 서로 모의할 기회를 차단해야했기에 대화할 수 없도록 칸칸히 벽을 세워뒀고 작은 움직임도 어디서든 감시할 수 있도록 했기에 이런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소통하려고 했으면 방법이 있었겠죠~!^^;;

 

 

 

 

 

 

여기가 독방(먹방)의 용변 배출구에요.^^;;

배출구 밑에 바로 사각통을 두어 용변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어떻게든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도록 차단하는데 의의가 있던 거죠. 지금은 이 세개의 용변 배출구만 남았데요.

 

 

 

왼쪽에 보면 조금 색깔이 다른 벽돌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텐데 해방 후에 교도소로 쓰면서 인권문제로 화장실을 만들어줘야하다보니 한쪽 벽을 헐어서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여기서 모녀인 방문객과 일부 방문객들에게 저도 모르게 설명하면서 작년에 방문했을 때 해설사분이 설명해주신 대로 벽돌 색이 다른 이유와 일제강점기에 더욱 괴롭히고자 여름에는 전염병의 전파를 이유로 창문을 닫아버리고 겨울엔 환기 명목으로 창문을 열어 놨다고 하니 초등학교 4, 5학년은 되었을 법하던 그 여자 아이가 듣고는 자기 엄마를 보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하는 거 아냐??"하는데 이 어린 아이도 아는 건데 그땐 저 안에서 꼼짝없이 일제가 하는대로 당했던 사람들은 오죽했을까요?

 

 

작년에 안들어가 봤던 공작사에 들어가서 노동력 착취가 이뤄진 현장을 간접적으로라도 목도할 수 있었어요.

 

 

 

 

 

작년에 왔을 때 굳이 가보려면 올라 가볼 수 있기는 한데 오래되다보니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이에 다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차마 한센트 병자들이 격리된 곳이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가는 것이 망설여지더라구요...!

저기는 냉난방이 안되는 다른 옥사와는 다르게 온돌이 깔려서 오른쪽에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 밑에 보면 일제 시절에 재소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던 나전칠기 공장이 있던 터이자 해방 이후 빨래터로 사용하기 우해 만들어진 사각 연못이 있어요.

바닥에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으나 많은 양의 물이 안산에서 내려와 자연스럽게 고여 있는 거라고 해요.​

 

 

 

 

 

 

 

우물을 지나서 보면 큰 미루나무 한그루가 서있는데 바로 사형장이네요.

 

 

 

 

 

 

여기서 몸이 떨어지면 지하에 의사와 관계자가 들어가서 사망확인하고 시신을 내간다고 하는데...!

 

 

 

저 지하 입구가 바로 의사가 사형수의 사망을 확인하고 관계자들이 시신을 내어갔던 입구였다고 해요.

 

 

 

그렇게 나온 시신은 사형집행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이 시구문을 통해 시신을 외부로 몰래 반출하기 위해 뚤어놓은 ​비밀통로로 나가게 되는데 고문이나 구타 등의 흔적이 많은 경우, 사형사실을 외부에 공개했을 때 사회적 파장이 우려되는 경우, 시신을 인수할 유족이 없거나 불이익으로 나서는 유족이 없을 시 등등에 이용되었어요.

 

원래 길이는 약 200m로 바깥세상과 연결되었으나 해방 직전 일제가 물러가면서 붕괴시켰고 지난 1992년 독립공원을 조성시 발굴하여 약 40m를 복원했대요.

더 복원하고 싶어도 주위에 아파트같은 주거시설들이 있다보니 거주하는 주민들의 반발이라도 일어나면 곤란할 수 있어 복원의 한계가 있다고 했어요.

 

 

 

저기가 격벽장이고 들어가는 입구가 저기 있네요.

근데 전 오후 2시쯤에 있는 무언가가 자꾸 신경이 쓰여서 맘이 조급해서 들어가보지도 못 하고 지나가기만 했네요...!​ 은근 안그런 거 같아도 돌아보는데 한시간 이상은 족히 잡아먹는 것 같아요...! 엄청 힘들구요...!^^;;

 

 

 

 

여옥사를 발굴, 재현하기 위해 펜스를 쳐놨더라구요.^^..

 

 

전 그전에 복원해두었던 유관순 열사가 병들어 순국한 그 옥사로 향했어요.

이날 행사로 인해 마네킹을 넣서 복원해둔 지하 감옥​은 잡동사니들로 가득해서 볼 수 없었어요.

 

 

지하 감옥은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이 제한 되어 있지만 원래의 계단은 바깥에 있었으나 92년에 복원하면서 안전문제로 폐쇄하고 현재의 나무 계단을 임시로 만들었는데 그 마저도 막아서...!^^

일설에는 이 지하 공간에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열사를 징벌하기 위해 감금했다고도 하구요, 한편으로는 교도관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이후에는 이불이나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해요

 

 

 

 

저 수형표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모습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건 아는 사람은 알거에요.

작년 여기 오기 전에 접했던 신문기사와 해설사 분의 설명으로 고문과 구타, 폭행 등으로 다소 변형이 있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3d로 복원된 얼굴과 수형표에 있는 사진의 얼굴, 그 전에 동무들과 찍은 사진에 있는 얼굴을 비교하면 확실히 다르다는 걸 비교가 되겠지요.

 

 

 

 

 

 

 

잔학한 일제가 자신들과 체제에 위협이 되는 존재인 인물이거나 독립을 위해 애쓰는 불령선인이라면 남녀노소 임산부든 아니든 무족건 감방에 쳐넣고 출산이 입박하면 그때 잠시 달구지 같은 수레같은 데 눕혀서 소지같은 사람이 끌고 가서 내보내주는데 애 낳고 데리고 들어와도 열악한 그 곳에서 밥을 더 준다던지 기저기랑 옷, 이불 같은 걸 더 준다는 것도 아니고 출산과 양육을 하기엔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인 건 확실하죠.

아기가 아니더라도 어른들도 힘든 판에 아기들은 얼마나 살기 더 힘들겠아요.

 

 

 

 

 

 

 

 

 

 

 

 

참 많이 외롭고 고단하고 힘들었을 그곳이지만, 남자들도 견디기 힘들었을 곳에 여자의 몸으로 더 고생하셨을 독립운동하셨던 분들, 한국을... 아니 당시 조선을 국적, 인종, 언어 등을 떠나 누구보다 많이 사랑하셔서 지키려다가 옥고를 치르셨던 분들... 정말 이병희 지사님의 말씀처럼 고문... 그게 무서웠다면 아무도 나서려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독립이 있을 수 없었을텐데...!!

 

재차 방문하였던 곳이긴하지만, 그 역사와 국가 및 민족을 위해 저항하셨던 분들의 희생에서 오는 무게로 인해 매번 목이 메여서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심어두고 갑니다.

제발 일본에서 더 늦기 전에 반성하고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고, 우리 나라를 포함한 강제 점거하고는 식민지로 괴롭혔던 나라와 민족들에게 사과하며 속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자비로 다녀온 개인의 여행기/답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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